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고전 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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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 이 ‘근심’을 영어 성경에서는 ‘sorrow’라는 단어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 ‘sorrow’라는 단어는 우리 말의 ‘근심’보다는 조금 더 강도가 높은 표현이네요.. ‘슬픔’, ‘비통’, ‘비탄’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후회’, ‘고통’의 의미도 가지고 있구요..

우리를 참 힘들게 하는 단어들입니다.. 때로는 이런 단어들 자체가 우리를 힘들게 할 때도 있죠.. 산다는 거..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참 힘든 일이기도 하고.. 때로는 정말 ‘sorrow’한 일이기도 하죠..

바울은 참 이상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을까요… 우린 참 연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근심과 걱정, 슬픔과 비통함이 우리의 사고를 마비시킬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슬프고 비통할 때는 그것을 하나님과 연관시킨다는 것 자체가 힘든 때도 있습니다..

근데.. 바울은 그 근심 조차도.. 아니.. sorrow조차도 하나님과 연관시키며 그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 이 말 전후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신도들에게 ‘근심’을 준 것을 후회했지만.. 결과적으로 그 ‘하나님의 근심’이 고린도 교회의 신도들을 회개함으로 이끌었기 때문에 감사한다는 고백을 합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근심을 주십니다.. 슬픔을 주실 때도 있죠.. 하지만.. 적어도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유익함을 주는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린 역시 연약한 존재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우리에게 유익함을 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 근심때문에 힘들어 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 결과는 유익함이기 때문에 근심해서는 안된다는 그런 말은 못하겠네요.. 힘들어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죠.. 여러가지 근심과 아픔 때문에 힘들어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사람도 아니죠.. ^^;

그러나.. 힘들어 하는 가운데서도, 그 힘든 것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 속에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음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그 아픔과 절망 속에서도 마음 한 구석에 조그마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어둠은 그 자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빛의 부재일 뿐이다’라는 말이 있는 것 처럼.. 정말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어쩌면 근심과 슬픔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 때문에 희망을 잃어버렸다는 그 사실이 아닐까요..

우린..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에겐.. 하나님이 계시니까요…

샬롬…

어제나 오늘이나…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히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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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한결같은 사람이 있다면.. 우린 그 사람을 최고의 가치를 지닌 사람으로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린.. 항상 한결같을 수 없습니다. 주변 상황에 흔들리고, 자신의 마음에 흔들리고, 다른 사람의 말에 흔들리는 것이 바로 우리 사람들이죠..

그러나.. 우리 주님은 언제나 동일하십니다. 하나님의 동일하심은 영원함을 의미하며 그 생각과 결정에 변함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 얼마나 힘이 되는 말씀인지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는 하나님…

그렇기에.. 우리가 얼마든지 믿고 신뢰할 수 있는 그분..

그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한결같으심이 바로 나의 힘입니다.
내 상황이나 내 처지에 상관없이 어제도 나를 사랑하셨고, 오늘도 나를 사랑하고 계시며.. 내일도, 영원토록 날 사랑해 주실테니까요…

예수를 바라보자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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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를 받은 믿음의 선진들과 약속을 받은 우리들과의 연합을 통해 온전함을 이루려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증거한 히브리서 기자는, 그 수많은 증인들을 보며 우리의 무거운 짐과 얽매이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의 길을 가자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라는 기자의 권고는 영어성경에 “Let us throw off…” 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스스로가 그 무거운 짐과 죄를 벗어 던져버리라는 권고입니다.. 이 말은.. 수동형이 아닌 능동형입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벗겨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벗어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가 무거운 짐과 죄를 벗어버리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벗겨주시기를 기다리시는게 아니라 스스로 벗어버리기를 원하고 계시는 거죠.. 그리고 예수를 바라보며 그 뒤를 따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온전케 됨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진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오실 메시아에 대한 증거를 받았으며, 예수님 이후의 우리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현실로 이루어짐을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우리는 온전해 질 수 있습니다. 영어 성경이 훨씬 직설적이네요.. “Let us fix our eyes on Jesus..” 우리의 눈을 예수 그리스도께 ‘고정’시켜라..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눈을 예수님께 완전히 ‘고정’시켜버리라는 거죠..

예수님을 알지 못했던 ‘증거’를 받은 이들은 그 증거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으며, 약속의 성취를 본 우리는 그 약속의 성취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온전하게 만드셨습니다..

함께 한 곳을 바라본다는 것은 분명 소중하고 값진 일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로 한 분이신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는 가장 소중한 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때론.. 너무나도 부족한 스스로의 모습을 보기도 하고, 수많은 짐에 억눌린 스스로의 모습에 가슴아파하기도 하고, 얽매이기 쉬운 죄에 또 얽매이고 있는 자신을 보며 한탄하기도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해결방법은 간단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 짐을 벗겨주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짐을 벗어버리고 그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온전해짐의 방법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참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스스로 짐을 벗는다는 것도 어렵고, 한결같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도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있습니다. 수많은 동역자들이 내 주위에 함께 있다는 것.. 그건 엄청난 축복입니다.. 아마도.. 함께 한다면.. 스스로의 짐을 벗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인내하며.. 나에게 주어진 길을 달려가야겠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럴 수 있도록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동역자들이 함께 있음이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샬롬…

온전함..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히 11: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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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이라 불리며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그들의 믿음을 어떻게 지켜나갔는지를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는 성경입니다..

근데.. 그 히브리서 11장의 마무리에 이런 말씀이 있네요.. 그들이 다 믿음으로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고.. 그 이유는 약속을 받은 우리와 함께 온전함을 이루게 하기 위함이라구요..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나는 믿음의 선진들은 그저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받았을 뿐, 그 약속의 성취는 그들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두 가지 생각이 듭니다..

첫번째는.. 일반적으로 인정하듯이 이 믿음의 선진들은 역시 대단한 믿음을 가졌다는 점입니다.. 그들의 일생에서 약속의 이룸을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믿음만으로 증거를 삼았다는 것은.. 역시 대단한 믿음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번째는.. 역시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시라는 생각입니다.. ^^; 만약 구약시대에 인간들의 삶에 깊숙히 간섭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런 훌륭한 믿음을 허락하시고 약속의 성취도 보게 하시며 그럼으로 온전함을 이루셨다면.. 우린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에게는 약속의 증거를, 우리에게는 약속의 성취를 주심으로 비로소 온전함을 이루셨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기록합니다..
아무리 그들의 믿음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우리가 없이는 온전함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죠… 더구나 우리가 받은 것은 ‘더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온전함이란 부족한 여럿이 모여서 함께 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지극히 일반적인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러셨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린.. 참 부족합니다.. 그리고 뜻밖에도 그 부족함을 아시는 하나님, 그 부족함을 충분히 채우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그 부족함을 완전히 채워주시지 않습니다. 부족한 대로 놓아 두시는 부분이 있죠..

그리고.. 그 부족한 우리들이 함께 동역하고 함께 걸어감으로 온전함을 이루게 하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역의 비밀이 있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을 부러워하고 그들의 믿음을 따라가기 위해 노력해야 겠지만, 그와 동시에 약속의 성취를 볼 수 있는 큰 은혜가 우리에게 있음을 자랑스러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린.. 남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참 부러워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것들을 말이죠..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고, 나 자신을 사랑하는 눈으로 본다면 내게 있는 참 많은 자랑스러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남의 것들을 부러워만 해서는 우리에게 주어진 일들을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내게 있는 자랑스러운 것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걸 겸손하게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어 내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사역의 비밀입니다..

I am who I am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출 3:14)

God said to Moses
“I am who I am. This is what you are to say to the Israelites:
‘I am has sent me to you’ ” (Exodus 3:13, N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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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있는 자.. 네.. 맞습니다..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어느 누구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그 스스로가 존재하기 원해서 존재하는 존재 자체.. 그 존재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 근원이 반드시 존재합니다.
근원이 없이는 어떤 존재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근원이 무엇이냐를 아는 것은 어쩌면 우리에게 있어서는 너무나도 소중한 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근원이 없습니다. 그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근원이 되시기에 충분하신 분이십니다.

내 근본이 자랑할만한 근본이라면… 그것은 내게 있어 무척이나 큰 자랑거리가 됩니다.. 특히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내 조상이 누구냐에 큰 의미를 두기도 하죠..
내 조상중에.. 위대한 인물이 있었다면 난 그것으로 어깨가 우쭐해집니다.
내 조상중에.. 나라에 해를 끼친 사람이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부끄러워집니다..

내 근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며.. 이 세상 모든 것의 근본이 되십니다.. 사실.. 하나님이 우리의 근본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훨씬 자랑스러울텐데.. 왜 원숭이와 박테리아를 우리의 근본으로 만들려고 많은 과학자들이 그렇게 애쓰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

나의 근본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그것이 나의 힘이고..
그것이 나의 기쁨입니다..

샬롬..

말, 말, 말…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딤후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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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참 많은 말을 합니다..
근데.. 왜 말을 할까요.. 의사소통이 목적이라고 말은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쩌면 우리의 말은 내 의사를 남에게 전달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내 생각을 다른사람에게 전하기 위한 수단이 우리의 말이라는 거죠..

아무리 생각해봐도 말이라는 게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이기 위한 수단은 아닌 것 같습니다.. ^^;

그렇기 때문에..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은 다툼을 일으킨다는 것이겠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해 주고, 그 사람의 마음을 받아들여주는 것이 분란을 없애는 방법입니다. 내 생각을 남에게 주입시키고, 내 생각대로 다른 사람도 생각해 주기를 원하는 마음은 때로 분란을 일으키게 되죠..

참 말은 많이 하지만.. 수많은 우리의 말들을 또한 후회하게 되는 것은.. 그것이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내 생각을 남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노력보다 남의 생각을 이해해 주고 남의 마음을 받아들여주기 위해 노력하는 노력이 우리 속에 있을 때.. 그 속에 한나님의 사랑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입은 말하기 위해 있는 것이긴 하지만… 듣기 위해 있는 귀도 잘 활용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두려움과 사랑..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일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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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참 두려워하는 것이 많습니다..
불확실한 우리의 미래를 두려워하고,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모르는 것에 접근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 모든 것은 확신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죠.. 우리의 미래가 확실하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정확하게 알고 있고, 내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일들만을 접한다면 우리 속에 두려움이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극히 당연하게도 우린 그런 확신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린 항상 두려워합니다..

근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두려움을 가지는 것이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네요.. 사랑안에 두려움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두려움을 가지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한 사랑이 없다는 말이네요..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을 사랑하고, 우리의 불확실한 미래를 사랑하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을 사랑한다면.. 그 속에는 두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말인데..

글쎄요.. 사실 자신이 없네요.. 그 모든 것을 사랑할 자신이요..
그 모든 것을 사랑한다면.. 사실 두려움은 없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믿어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정말 사랑하다면 두려움은 사라지겠죠..

하지만.. 그렇게 사랑할 자신은 사실 없네요…
그러나..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건.. 내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겠죠..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라고 부탁하셨고 명령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린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와 이웃을 사랑해야만 하는 것이고..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 속에 있는 수많은 두려움을 몰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미래는 불확실합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하지만.. 그 미래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사랑할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않으렵니다..
잘 모르는 사람을 만날때마다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존재들이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형상을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랑할 것입니다. 그러면 두려워지지는 않겠지요..
잘 모르는 일을 접할때마다 두려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 일들 속에서 새로운 것을 배울수 있고, 그 길을 통해 하나님께서 새로운 것들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때문에 사랑할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참 많은 두려움이 있지만.. 그 보다 앞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품고.. 그 두려움들을 몰아내길 소망합니다.

두렵지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 그것은 사랑입니다..

스스로 개척하라…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사람이 비록 철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수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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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보며 점점 더 느끼게 되는 것은.. 내가 기도를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게 이런이런 것을 주세요”,”하나님.. 이렇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거든요..

요셉 자손이 가나안 땅을 분깃으로 나누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이렇게 큰 지파가 되었는데 우리에게 이정도의 땅만 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호수아..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의 땅을 너희가 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요셉 자손..

“그들은 강한데 우리가 그들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라는 그들의 말에 여호수아가 대답힙니다..

“네가 개척하라, 삼림도 네 것이 될 것이고 그들을 네가 쫓아낼 것이다…”

“하나님… 제게 이것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는 제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은…
“네가 스스로 개척하라”는 말씀입니다..

작심삼일이라 했던가요.. 수없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기도하는 만큼 다짐하긴 하지만.. 우리의 결심은 그리 오래가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ㅡㅡ;
그런 제게 하나님은 여전히 말씀하시네요..

“네 스스로 개척하라..”
“네가 능히 할 수 있으리라..”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선 제가 노력하는 것을 보고싶으신게지요.. 그래도 나름대로 해 볼려고 발버둥치는 그 모습을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시기 때문에 한 발 앞서 가셔서 내가 취할 그 땅을 이미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 곳으로 가기만 하면 되는데..

그저 그 곳을 향해 걸어가기만 하면 되는데, 그걸 깨닫지 못하고 아직도 “하나님.. 저 땅에 가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있는 제 자신을 봅니다..

그 땅으로 걸어가는 것은 나 자신이 할 일이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준비해 놓으셨고.. 이제 나 자신의 발로 꿋꿋하게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걸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 세상에서 승리하셨으니까요…

proclaim my praise..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사 43:21)

the people I formed for myself
that they may proclaim my praise. (ISAIAH 43:21, N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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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라고들 말합니다.. 여기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고 계시네요.. 우리를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구요…

근데.. 영어 성경을 보니 조금은 다른 어감이 느껴지네요..
“my praise”를 “proclaim”하기 위해서이다..

즉.. 하나님의 찬송을 선포하기 위해서이다..라는 말이죠..
한편으로 praise에는 ‘칭찬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칭찬’하는 것이라는 뜻이죠..
즉.. 하나님을 향한 ‘칭찬’을 ‘선포’한다, 또는 하나님을 향한 ‘칭찬’을 ‘증언’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참된 찬양이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흔히 ‘찬양’이라고 말을 할 때는 무심결에 음악으로, 노래로 찬양하는 것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찬양은 단순히 노래로만 하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칭찬’을 드리는 모든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을 향한 ‘찬양’ 즉 ‘칭찬’은 우리말로 표현하듯 단순히 ‘부르는 것’이 아니라 ‘선포’하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찬양이 단순히 우리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시는 것을 깨달으며, 과연 어떻게 찬양해야 하는가를 깊이있게 생각하게 합니다..

아름다운 음악과 마음을 감동시키는 노래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감정을 손들고 찬양하면서 마음껏 찬양하고 눈물 흘리며 기도하지만.. 일상 생활로 돌아오면 다시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버리는..그렇게 우리의 삶 자체를 크게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우리의 감정에 많은 것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스스로를 돌아보게 됩니다..

기독교인들끼리 모여서 ‘찬양’을 ‘부르는 것’이 찬양의 모든 것이 아니며..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찬양’을 ‘선포’하고 ‘증언’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예배와 우리의 모임 중에서 노래로 드리는 ‘찬양’도 중요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이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찬양’을 당당하게 ‘선포’하는 우리의 모습 역시 중요함을 잊어서는 안되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사실을 다시금 기억하고 우리가 너무나 쉽게 표현하는 ‘세상’에 대한 마음가짐을 다시금 진단해 봐야겠다는 반성도 하게 되네요…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세상’을 우린 너무 쉽게 ‘타락한 것’으로 단정짓고 있지는 않은지요..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 독생자를 주셨는데…
그리고.. 이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찬송’이 선포되길 원하고 계시는데..
우린 우리의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기에만 급급하고 있지나 않은지 돌아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깨닫기를 겸손히 기도하며…

하나님.. 나를 시험해 주세요..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시 13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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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참 당당했었나 봅니다.. 하나님께 감히(?) 자기를 시험해 달라고 하다니요..

오늘 아침.. 출근하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15분을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을 조급해 하고 있을 때 버스가 오더군요..
늦게 온 터라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기사분이 앞문을 열어주지 못하고 뒷문을 열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내릴 때 차비를 내라면서요.. 기다리던 사람들 대여섯명이 함께 올라탔습니다..

저 역시 버스를 탔습니다.. 그런데.. 참.. 인간의 나약함이란.. 그 순간 별 생각이 다 들더군요.. 사람도 많고.. 누가 뒷문으로 탄 사람인지도 알 수 없으니.. 내릴 때 모른 척 하고 그냥 내리면 아무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

거의 사람들이 다 내릴때까지 버스에 타고 있었는데.. 내릴 때 앞쪽으로 가서 계산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버스비 600원에 이렇게 자신이 초라해 보이긴 처음이었습니다.. 세상에.. 그걸 내야하나 말아야 하나를 가지고 고민을 하다니요… ㅡㅡ;

사실.. 그냥 내리면 그만이었습니다. 아무도 모를테니까요.. 하지만.. 내리는 순간 전 차마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실텐데 어떻게…
그래서.. 앞으로 가서 버스비를 내고 내리기 위해 뒷문에 섰습니다..

글쎄요.. 잘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것을 했을 뿐이죠.. 당연히 해야 할 것을 “하지 말까?”라고 생각했던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정직한 것이 당연한 것이고, 치뤄야 할 값은 치루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그 당연한 것이 도리어 어색하게 느껴지는 지금의 우리들의 모습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윗의 시편.. “하나님. 나를 시험하셔서 내가 얼마나 바르게 서 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지 알아주십시오”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다윗의 모습..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수많은 실수를 했고, 그것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저렇게 당당할 수 있음은…

그 속에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겠죠..

하나님 앞에서 당당할 수 있음은.. 우리에게 허물이 없거나, 죄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를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말 당당할 수 있는 모습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