仁子無敵이나 仁子有敵이라..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벧전 3: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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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선을 행하면 우리를 해할 자가 없다고 말씀하시네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 복있다고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결국에는 선이 악을 이기게 되겠지만.. 그 과정속에서는 많은 어려움이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고 우리의 선함을 지켜나간다면 그 선함을 이용하려하고 우리를 괴롭히려는 세력들이 결국에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이 참 많이 어두워져간다고 한탄들을 합니다.. 하지만 그런 한탄을 하면서도 우린 빛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그 어둠에 동참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는 않은지요..

착하게 살고, 남을 위해 살고, 손해보며 살면 바보같이 산다고 손가락질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게 싫어서 우린 착하게 살기보단 ‘영리’하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는 않은가 되돌아봅니다..

어둠은 그 자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빛의 부재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빛이 없다면 그것은 결국 어둠일 뿐입니다. 애써 어둠을 찾아가야 어둠속에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빛이 없는 그 상태가 바로 어둠인 것이지요..

빛의 부재로 인해 어둠속에 사는 존재가 아닌.. 빛과 함께 살아가며 어둠을 이겨나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지킬 것은 지켜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러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롬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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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죠.. 누가 뭐래도 우린 사회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우리가 속해있는 사회에 대해 수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런 여러가지 부조리들 때문에.. 사회를 등지고 살아가는 경우도 많이 보게 되죠. 물론 잘못된 것을 그냥 보고만 있는 것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그 사회를 등지는 것도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공세와 국세를 바치고 위정자들에게 복종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위정자들이 올바르고 그들의 행위가 아름답기 때문에 그들을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들을 따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음.. 어떻게 보면 공세와 국세를 받을 자격이 있는 자에게 주고 존경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을 존경하라는 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만.. 바울의 뜻은 그게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 말은 두려워 할 가치가 있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존경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을 존경하라는 말이 아니라, 두려워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을 품고, 존경받아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은 존경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비록 위정자들이 잘못된 모습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비록 그들이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위치를 인정해 주는 모습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비단 위정자들만을 향한 모습을 요구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린 때로 우리 주위의 사람들을 보며, 그들이 하찮게 보이면 우선 무시하고 접근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아무리 하찮게 보이더라도 그들의 입장과 상황을 인정하고 나와의 관계 속에서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지켜야 할 것은 지키는 모습.. 그것이 이 사회속에서 살아가야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다윗의 저주…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시 1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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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기도입니다.. 자신의 적들을 하나님께서 물리쳐 달라는.. 자신의 적들을 향한 ‘저주’의 기도중 한 부분입니다..

다윗의 그의 적들을 ‘저주’하고 있지만.. 그 속에서도 역시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우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며,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지만.. 실제의 우리 삶 속에서는 우리 나름대로 상황을 해석하고 우리 마음대로 행동할 때가 더 많음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죠..

내게 악한 일을 행한 사람에게 어떻게든 갚아주지 않으면 맘이 놓이지 않는 그런 우리들이 아니던가요.. 우리의 마음속에 때로는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남을 우린 인정할 수 밖에 없지만.. 우린 그것을 인정하는 것을 두려워하죠..

어떤 상황이든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선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자신의 그 미워하는 감정과.. 심지어 ‘저주’하는 감정까지도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인정하며 하나님께 간구하는 다윗의 모습을 보며.. 어쩌면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린.. 성경이라고 하면 모두 ‘좋은 것’으로만 해석하려고 하는 묘한 버릇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 들어간다고 하면.. 어린아이=순수 라는 공식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순수’라는 것은 ‘깨끗함’이라고 결론지어 버리죠..

하지만.. 어린아이의 순수함은 단지 ‘깨끗함’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합니다. 아프면 울고, 기쁘면 웃고, 기분나쁘면 기분나쁘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을 미워하고,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따르는 것이 어린아이입니다..

우리가 어린아이같지 못한 이유는.. 우리의 속사람을 겉사람으로 지나치게 포장하려는데 있는 것은 아닌지요.. 기쁠때 웃고, 슬프면 웃고, 화나면 화내는 것이 어쩌면 인간의 본연의 모습일진대.. 우린 화내는 것은 나쁜 것이라 생각하고 그것이 내 삶속에서 사라지기를 원하며.. 그러지 못하는 내 모습으로 인해 실망해 버립니다..

하나님께선.. 우리가 감정에 솔직해 지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울고,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솔직히 미워한다고 인정하고, 화나면 화난다고 인정하는..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그것이 그저 감정의 표출로만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솔직히 인정하고 하나님께 내어놓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다윗처럼 기도해야 한다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한 감정이 사라지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닌.. 그저 솔직한 감정을 하나님께 고하고 그 이후의 일들은 그저 하나님께서 맡아달라는 기도..

하나님의 법궤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춤을 추고, 자신을 미워해달라는 사람을 ‘아빠 저 애 때려주세요’라고 응석부리는 아이처럼 하나님께 매달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다윗의 순수함을 닮고 싶습니다….

열매..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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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정말로 하나님을 믿고 많은 권능을 보였던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선지자 노릇을 했으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살아갔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며 불법을 행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떤 면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못했던 것일까..도대체 하나님께서 정말로 소중하게 여기시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귀신이 쫓겨나며, 많은 권능이 행하여진다면 그 역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일텐데.. 그들을 모른척 하는 정도가 아니라 불법을 행한 자들이라고 떠나라 하시다니..

아마도..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힘입고 귀신을 쫓아내며 권능을 행하면서..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자신들의 영예로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들의 열매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답고 멋진 열매였을지 모르나…. 모든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인정한 열매였을지 모르나.. 하나님께서는 그 열매 속에 허영과 자만심과 교만함이 가득차 있음을 보셨기 때문이리라…

우린.. 참 어리석습니다..

열매.. 보기에 좋은 열매 보다는.. 비록 하찮게 보이더라도 심겨지고 싹이 날 때 더 아름다운 나무를 키워나갈 수 있는 그런 열매가 내 삶 속에서 맺히기를…

아무 형상도 보지 못한…

여호와께서 호렙산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신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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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형상도 보지 못했다.. 그렇습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모습을 본 자는 아무도 없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명기의 이 말씀을 시작으로.. 우상을 만들지 마라고 경고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과, 우상을 만드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기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보여주지 않으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했던 것 처럼 그 형상을 보면 죽는다든지 하는.. 그런 것 때문만은 아니었지 않을까요..

어쩌면.. 그것은 눈으로 보는 것에 많이 좌우되는 인간의 약함을 아셨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린.. 눈으로 보는것을 가장 신뢰합니다.. 그래서 눈으로 본 것은 모두가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말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린 또한 실수를 많이 합니다..

우리의 눈으로 사람을 보고… 내 눈에 보이는 것으로 그들을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그것이 진실이냐 아니냐는.. 내 눈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말이죠..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보여주지 않으신 것은.. 이러한 우리들의 성정을 아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당신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으셨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경고하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내 생각과, 내 경험과, 내 눈과, 내 판단으로 인식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니까요.. 그 분은.. 내 모든 것으로.. 내 삶 자체로, 내 삶 전체로 그저..느껴야 하는 분이십니다..

눈으로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는 믿음이 복이 있도다…

한 편지..

월요일 아침.. 한 고등학생 소녀가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To…

나는 어제 너희 교회에 갔었어. 비록 네가 나를 단 한 번 초대했지만 너는 내가 교회에 나오는 것을 진심으로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나는 네 옆에 앉으려고 너를 찾았지만 너는 없었어. 그래서 나는 맨 뒷줄에 앉으려 했는데 그 줄은 꽉 차서 앉을 수가 없었단다.

그 때 안내하시는 분이 오셔서 나를 맨 앞으로 인도해 주셨는데 앞으로 나아가는 나는 마치 행진하고 있는 것 같았어.

곧 예배는 시작되었고 성도들은 내가 모르는 찬송가를 불렀어. 나는 따라서 흉내내려고 노력했고 노래하는 척 했지만 결국은 그 찬송을 하지 못했지 뭐야.

그런데 나는 성도들 중에 몇몇 사람들이 찬송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어. 한숨과 하품을 하면서 그들은 단지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고, 내가 학교에서 좋다고 여기던 세 아이들은 서로 속삭이고 있었으며, 또 어떤 사람은 킥킥대며 웃고 있었어.

나는 너희 교회가 그러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어. 목사님의 설교는 재미있었지만 성가대원 몇 명은 그런 것 같지가 않았어.

피곤해 보였고 지겨운 표정이었으며, 어떤 사람은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 중 한 사람에게 계속 미소짓고 있었어.

목사님은 신앙의 확신에 대해 설교하셨는데 그 말씀이 내게 와 닿았기에 예배가 끝나면 이것에 대해 누군가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 하지만 축도가 끝남과 동시에 이 모든 생각은 사라졌어.

나는 옆에 있던 사람에게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했으나 그들은 진심으로 답례하는 것 같지 않았어.

나는 그 말씀에 대해 토론할 친구를 찾았지만 그들은 새로운 화제를 이야기하느라고 정신이 없었어.

한 소녀와 잠시 이야기를 했으나 곧 인파에 휩쓸려 우리들의 대화는 중단되었어. 우리 부모님은 교회에 다니시지 않지만 나는 사랑이 있는 모임에 가입하려고 어제 혼자 교회에 갔던거야.

그 곳을 떠날 때 교회 입구에 있는 게시판을 보니 ‘사랑이 넘치는 교회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라고 씌여 있었어. 그러나 나는 다시는 교회에 가지 않을거야.

미안해…

from….

불가능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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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우린 말에 실수가 참 많습니다.. 아니.. 어쩌면 항상 실수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임을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자가 온전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도 우리 인생속에서는 온전해 질 수 없는 존재인 우리들은.. 말에 실수하지 않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되는군요..

말에 실수하지 않고 살기는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에 실수가 없도록 살아가라고 야고보는 권면합니다.. 게다가.. 이건 성경말씀이니.. 하나님도 그걸 원하고 계시다는 뜻이군요..

이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불가능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난 도저히 해 낼 수 없을 뿐 아니라.. 어떤 조건하에서도 불가능한 것을 하나님께서 요구하고 계시는군요.. 이건..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니 할 수 있다는 말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근데 왜 하나님께선 우리가 전혀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을 하라고 요구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온전하게 되는 그 자체가 아니라.. 온전함을 향해 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그 노력자체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만일.. 우리가 능히 해 낼 수 있는 일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셨지만 그걸 우리가 해 내지 못한다면.. 우린 심한 자괴감에 빠지게 될 지도 모릅니다. 할 수 있는 것을 못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어차피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라면.. 그걸 못해낸 것 자체가 부끄러움은 아닐것입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기에 우린 노력했고.. 어차피 우린 해 낼 수 없었던 것이기에.. 그것을 이루지 못함으로 인해 괴로워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막 걸음마를 시작하려는 아기가 제대로 걷지 못하고 쓰러지는 것을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부모는 비틀거리며, 쓰러지면서도 한 걸음씩 내딛는 아기의 걸음을보고 기뻐합니다. 걷고 못 걷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걸음씩 내딛고자 하는 아기의 모습이 이쁘기 때문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들은.. 어쩌면 우리 평생에 절대로 이루어내지 못하는 불가능한 것들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 일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하나님께선 기뻐하신다는 사실과, 그런 우리의 필요함을 적절히 채우시는 하나님을 믿기에..

오늘도 비틀거리는 걸음을 한 걸음씩 떼어 봅니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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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이 고백은.. ‘하나님만 믿으면 나는 만능입니다.’라는 고백은 아닌 것 같습니다.. 첨엔.. 어느정도 그런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최근 그 주변의 말씀들을 보면서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감사하며 자족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그 역시 쉬운 일은 결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히 생각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것 보다는 그래도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하나님 안에서 우린 어떠한 환경에서도 감사하며 자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며,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믿음이 뛰어나다고 해서.. 모든 일에 기도함으로 다가간다 하더라도.. 우리가 천하무적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리에겐 많은 어려움이 다가올 수 있고, 배고픔이 찾아올 수도 있지만.. 우린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 모든 것을 이겨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니.. 단순히 이겨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인정하고 자족함을 배워나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할 수 있음’입니다…

나는..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