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평하신 하나님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민 20: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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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꼽히는 모세.
그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가나안땅까지 인도하는 이스라엘 역사의 가장 큰 역할을 맡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한 순간의 실수로 인해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의 공의.. 잘한 것은 잘한 것이고,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기에 지금까지 하나님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고 하더라도 수고한 것에 대해서는 값아 주시되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징계하시는 하나님, 이건 매정함이나 냉정함이 아니라 공평함이다.

공평하신 하나님.. 그러기에 내게 있어 하나님은 부모님과도 같은, 친구와도 같은 친근한 분이시기도 하지만 무섭고 두려운 분이기도 하다..

너희는 가만히 서서..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 14: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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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우리는 일이 닥칠 때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결해 보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한계를 느끼고 낙심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싸우신다는 것…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기다려야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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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예전에 썼던 글이다.
미처 못했던 생각은.. 저 일이 있은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발로 홍해를 건너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들어서 홍해 건너편으로 데려다 놓은 것이 아니라 말이다.

우리는 우선 가만히 서서 기다려야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시는지.. 하지만 그 이후에는 내 발로 걸어가야만 실제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잊을때가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먹이를 달라고 입을 벌리는 아기새에게 엄마 새가 먹이를 주지만, 그 먹이를 삼켜서 소화시키는 것은 결국 아기새의 몫인 것을..

절기를 싫어하시는 하나님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사 1: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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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 보게 된 이사야의 말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결코 형식을 경히 여기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고, 제사를 드리는 법과 성막을 짓는 법, 심지어는 제사장의 옷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조차 알려주셨던 분이시다.
분명히 안식일을 지키라 명하셨고, 절기를 정해주셨으며 그것을 지키는 것을 기뻐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형식속에서 임하는 인간들의 마음을 보신 것이지 형식만으로 기뻐하셨던 것은 분명 아니었다. 그렇기에 사무엘을 통해서는 순종이 제사보다 나음을 말씀하셨고, 이사야를 통해서는 분향을 가증히 여기고, 월삭과 절기를 싫어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분명 형식은 소중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마음과 믿음 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교만해지고, 더러워지고, 악해져 있다면 우리의 예배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 아무리 좋은 옷을 챙겨 입고 예배에 참석한들, 내가 가진 재산의 10의 9를 헌금으로 바친다 한들 그 속에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과 믿음이 없이는 그저 가증스러운 행동밖에 안되는 것을..

예배에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교회의 일에 열심히 참석하고, 전도를 하며 기도하고 찬양한다 하더라도 그때 뿐이고 교회 문을 나서는 순간 그 모든 \’거룩함\’에서 벗어나버린다면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책망을 들을 뿐이다.

오늘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다시금 생각해 본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한1서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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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많은 부분에서 우린 \’왜?\’라는 질문을 한다.

\’왜 그렇게 했느냐?\’
\’왜 그게 그런 것이야?\’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

등등…

그래서.. 우린 가끔씩 이렇게 물어보기도 한다.

\’왜 날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도 하게 된다.

\’하나님.. 왜 날 사랑하십니까?\’ , \’왜 날 구원하셨습니까?\’

그러나.. 내 짦은 지식 안에서, 성경의 어느 곳에도 \’하나님께서 이러이러해서 널 사랑하신다\’는 내용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혹자는 말했다. \’사랑하는 데에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가 사라질 때 사랑도 함께 사라지고 만다\’고..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는 불신과 불안 때문일까? 우리는 여전히 \’왜 날 사랑하지?\’라는 질문을 한다.

\’널 사랑하는 데는 이유가 없다. 나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고, 난 널 사랑한다. 그 뿐이다\’

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말이다..

하나님은 날 사랑하신다. 아무런 이유없이 그냥 사랑하신다. 그 뿐이다..

행복..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신 3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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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어떤 상황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말은 그렇게 할 수 있을 지 몰라도, 실제 그 상황 속에서 모든 일에 행복을 느낄 수는 없다.

분명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려있지만, 어떤 상황속에서도 한결같이 그 상황을 만족하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축복한 말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광야에서 죽어야 했지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너는 행복자다\’라고 선포한다.
모세 자신도 죽음의 순간에 행복했을까.. 그의 신앙으로는 행복했겠지만, 인간적인 마음에서는 아쉬움이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과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향해 너는 행복자라고 선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기에 행복한 존재라는 모세의 선포. 우리가 어디에서 우리의 행복을 우선적으로 찾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 준다. 인간적인 만족에서 오는 행복도 우리에겐 필요하고 소중하지만, 그 이전에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에 정말 행복하다는 고백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하지 말라 (롬 14: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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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한 분 이시다.
하지만 가만히 보면 하나님은 한 분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수 만큼 계시다는 것을 알게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기 이전에 나 혼자만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한 분 이시고, 항상 동일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하나님의 상을 만들고 그 하나님의 모습에 모든 것을 끼워 맞추기 위해 노력한다.

무서운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저 무서운 존재일 뿐이고,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모든 기도에 \’yes\’ 해 주시는 분이시다. 모두에게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으로 경험되어지지만 하나님은 동일한 한 분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가 경험한 하나님의 일부의 모습을 전체라 착각하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경험과 지식에 비추어 다른 사람의 행동과 상황을 판단한다.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기 전 기도중에 봤던 환상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내가 께끗케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15)\’고 하셨다. 로마서에서도 바울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속된 것이 없으나 그것을 속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속되다고 말하면서 우리의 마음이 열려져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 조차도 속되다고 말하고, 하나님께서 하기를 원하시는 일조차 자기의 기준에 비추어 속되다고 판단했던 베드로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말 것을 바울은 말한다..

판단은 하나님이 하신다. 내가 할 일은 하나님을 알고 확신하는 것일 뿐, 하나님의 일에 대해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일도, 다른 상황도 판단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그 일을 어떻게 사용하실지 우리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과 세상 일,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야 말로 하나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상치되는 것을 어찌 모를까..
하나님의 뜻은.. 이방인을 배척하고 때려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었음을..
예수님의 피로 생명을 살린 이웃의 행동을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에게 맞추어 판단하고 질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속에서 살아 역사하고 계심을..

하나님의 인도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출 13: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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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앞길에 놓여 있는 모든 조건은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지요..
그 선택에 지친 우리들은 때로는 하나님께서 나 대신 선택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지게 됩니다. 어느 길로 가야할 지 고민하지 않고..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그 길을 인도받았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말이죠..

내가 무엇을 해야 할 지.. 어떤 길로 가야 할 지 고민하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이 길로 가라..\’고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그러나..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조차 선택의 기로에 서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더 근원적인 선택을 해야만 했으니까요..

그건 바로.. 그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을 따라갈 것이냐 말 것이냐의 선택이었습니다. 40년간의 광야 생활.. 어쩔 수 없이 길을 가고는 있지만 매일 매일의 걸음 속에서 그들은 매 순간 선택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 선택 역시 고통의 연속이었을 겁니다.

만약 그들이 어렵게 선택하지 않았다면 광야 생활에서의 불평은 없었을 것입니다. 모세가 안 보인다고 우상을 만들지도 않았겠죠.. 적어도 그들에게 있어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의 인도를 따른다고 하는 것은 선택의 연속이었고, 시시때때로 그 선택이 바른 것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 그 선택이 과연 잘 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할 때면 그 두려움과 걱정을 모세에 대한 불평으로 털어놓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 그건 나 자신의 선택이 필요없는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도란.. 내 선택의 길입니다..
어느 길로 갈 것이냐에 대한 선택이기 이전에.. 하나님을 따를 것이냐 아니냐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그렇기에.. 고민없이 내 길을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은 부질없는 소망일 뿐입니다..

바라기는.. 고민하고 걱정하되.. 그 고민과 걱정이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결정을 대신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 결정이 하나님 안에서 바르게 이루어지고, 그 길을 내가 갈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억하라..

이 일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너희 앞서 행하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의 행할 길을 지시하신 자니라 (신 1: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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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나를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건 분명합니다. 내가 어디로 가야 할 지, 어디에 장막을 쳐야 할 지 모를때 하나님은 나를 위해 내 앞에서 장막 칠 곳을 찾아주시고, 내가 가야 할 길을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문제는.. 그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느끼고, 그 인도하심에 의해 내 걸음이 순탄함을 느낄때는 하나님께 감사하지만.. 그 길이 계속에서 순탄하게 나가거나, 내가 원하는대로 이루어지지 않을때 하나님에 대한 믿음조차 흔들린다는 점입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홍해의 기적을 보여주시며, 만나를 내려주시고 메추라기를 주셨던 하나님. 이방민족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주셨던 하나님의 그 인도하심을 틈만 나면 잊어버렸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나 자신과 오버랩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내가 가는 길이.. 내가 원하던 길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임을 기억하고.. 그로 인해 감사하기를 원합니다. 내 욕심과 내 고집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거부하고 다른 길로 가지 않기를 더더욱 원합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인도’라는 것을 바라보고 가는 삶은 지나치게 수동적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앞세우다 보니 어느새 ‘나 자신’이라는 것은 뒷전으로 몰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삶이 결코 수동적이지 않고 적극적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가 나를 밧줄에 매고 끌고가는 것이 아니라 불기둥과 구름기둥처럼 지표만을 보여주며 나 스스로 따라오기를 원하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결코 수동적이지도, 약하지도 않은 길입니다. 도리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가는…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다른 것들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고 타협하지 않을 수 있는.. 진취적이고 어렵지만 보람있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의 편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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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미련하고 약한 자들을 택하셔서 지혜있고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없는 것들을 통해서 있는 것들을 폐하고자 하십니다..

역시 우리에게 많은 힘을 실어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위로를 받고 스스로가 약하고 보잘것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힘을 얻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서서 주변의 있는 사람들을 보며 또다시 주눅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린 이 말씀을 잘못 적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약한 자들만의 편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들만의 편이기 때문에 약한 자들이 힘을 내어 살아가면 된다고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강한 자들을 미워하시며 강한 자들을 폐하기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말입니다.

미련하고 약한 자들을 들어 지혜있고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는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인용하지만.. 그 바로 뒤의 하나님의 참 의도는 무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 말입니다..

어떠한 존재라도 하나님앞에서 그 자신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동일한 죄인이요,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약한자들을 들어 강한 자들을 누르게 하시는 이유는 약한자건 강한자건 하나님 앞에서는 동일한 존재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이지, 어떤 상황에서건 약한 자가 강한자를 누르는 것이 올바른 것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의 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자의 손을 들어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욥 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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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참 많이 인용하는 말입니다. 특히 개업을 하거나 하면 반드시 들어가는 성구이기도 하죠..
어떤 일을 시작할 때마다 이 구절은 많이 인용됩니다. 그 결국에는 창대할 것을 기대하면서 말이죠..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말은 욥이 고통중에 있을때 욥의 친구였던 수아 사람 빌닷이 욥의 잘못을 지적하며 욥에게 한 말입니다. 욥을 격려하거나, 욥의 의로움을 인정해 주면서 했던 말이 아니라는 겁니다.

욥과 욥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벌을 받는 것이라고 욥에게 지적하면서.. 하나님께 빌고 용서를 구하면 그제서야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실 것이고, 그 시작은 미약하지만 결국에는 창대해 질 것이라는.. 충고의 말입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분명 우리의 잘못을 하나님 앞에서 시인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돌이키기 위해 노력한다면 분명 하나님은 미약한 우리의 시작을 창대한 결과로 돌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은.. 그 말이 아무리 바른 말이고, 그 의미가 틀림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 상황에 처해있는 상대방의 처지를 생각해 주지 않는 말은 결국 소용이 없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욥은 빌닷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처지에 놓였던 것이 아닙니다. 욥의 잘못 때문에 징계를 받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만을 보고 하나님의 징계라고 잘못 생각한 빌닷이 욥을 추궁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이 옳은 말이라고, 또는 내가 보기에 분명 이런 상황이라고 판단된다고 해서 남에게 충고하는 경우가 우리에겐 많습니다. 그 충고하는 말의 의미 자체는 잘못됨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 상황에 놓여있는 상대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왜 그에게 그런 상황이 주어졌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한 스스로의 노력과 관심, 사랑이 없다면.. 바울의 고백대로 그 말은 그저 울리는 꽹과리일 뿐입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격려의 말이든, 칭찬의 말이든.. 충고의 말이든.. 정말 그 상대방을 사랑하고 위하는 말일때 그 말은 힘을 가집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