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이 젖었습니다…

(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쌔 (수 3: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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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를 향하여 가던 도중 요단강을 건너는 장면입니다.

지금까지는 홍해를 갈랐던 하나님의 능력이 그저 요단강에 동일하게 임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홍해 사건이나, 요단강의 멈춤이나 동일한 역사라고 생각해 왔던거죠..

분명 여기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별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상황은 많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홍해는 사람들의 눈 앞에서 바다가 갈라지고 난 다음 물을 건넜지만.. 요단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궤를 멘 제사장들이 물 속에 들어가고, 그들의 발이 물에 잠길때까지 요단강은 전혀 변화가 없었습니다.

눈앞에 일어난 기적을 보며 그것을 믿고 따르기는 그래도 쉽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날지 않을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 기적을 믿고 따르기는 쉽지 않습니다. 홍해의 기적보다 요단강에서의 기적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고 여호수아에게 더 많은 믿음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물에 들어가 발이 잠길때까지 변화가 없던 요단강.. 그리고 그 요단강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널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걸음을 내디뎠던 여호수아와 제사장들, 이스라엘 백성들..

그 속에는 수많은 갈등과 고민이 있었을 것입니다. 불신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발을 내디딜때.. 그것도 이미 발이 물어 들어가 젖어들고 난 뒤에 일어난 기적..

하나님의 기적은 이렇게도 이루어집니다.. 우린 어쩌면 눈앞에서 바다가 갈라지는 홍해의 기적만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이미 내 발은 물속에 들어갔는데 왜 도와주시지 않습니까..’라는 한탄을 하면서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 때 요단강을 멈추셨습니다..

샬롬..

왜 믿는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요 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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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기독교의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를 기복적 신앙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죠..

적어도.. 예수님께서 그런 부분들을 경계하고 계신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떡을 먹을 수 있고 필요를 채워줄 수 있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이기에.. 무언가를 바라는 것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이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할 필요는 분명 있습니다. 내게 무엇인가를 채워주기 때문에 어떤 존재를 따른다면, 내게 채워지는 것이 없거나, 다 채워지고 나면 더이상 그 존재를 따라야 할 이유 자체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무언가를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받는 것이 분명 옳은 것일 것입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요.. ^^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따를 수 있는.. 그런 마음이 내 속에 있기를 기도합니다..

책망..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 (잠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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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만한 사람은 자신이 책망받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거만함 때문이죠. 지혜있는 사람은 책망을 받을때 자신에게 어떤 잘못이 있는지 돌아보고 그 책망이 정당한 것임을 깨달으면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책망한 사람에게 감사합니다.

똑같은 말을 해도 그 사람이 거만한 사람이냐, 지혜로운 사람이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형태가 다르게 됩니다. 당연한 것이죠..

이 말씀을 보면서 생각하게 된 것은.. 내가 사람들에게 말을 조심해서 지혜롭게 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나 자신이 거만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주의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나 자신의 잘못을 지적해 주고 정당한 책망을 해 주는 사람을 나의 거만함으로 미워하게 된다면.. 그것 바른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혜롭기를 기도합니다. 책망받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고 충고해 주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겸손하기를 기도합니다. 나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샬롬..

축복의 이유..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창 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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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디발은 분명 이방인입니다. 그 당시 이방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들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보디발의 집에 하나님의 축복이 내립니다.

그건.. 보디발때문이 아니라 그 집에 있는 요셉때문이었습니다. 불 곁에 있으면 그 따스한 열기가 전달되어 오듯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는 사람의 곁에 있으면 자연히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바라기는.. 나 자신이 하나님의 축복의 이유가 되어.. 나로 인해 내가 있는 곳이 복을 받고, 나로 인해 내 주변의 사람들이 복을 받을 수 있었으면… 하는 욕심을 부려봅니다.

내가 하나님의 축복의 이유가 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지만.. 그러나 감히 하나님께 바라고 기도해 봅니다. 내가.. 바로 하나님의 축복의 이유가 되어.. 내 주변이 복있는 곳이 되기를…

샬롬..

몸과 지체..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고전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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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습니다. 서로의 역할은 분명 다르죠.. 손이 하는 일과 발이 하는 일이 다르고.. 눈이 하는 일과 입이 하는 일은 분명 다릅니다.

손이 발의 역할을 맡을 수 없고.. 눈이 입이 하는 일을 대신 할 수 없는 것이 엄연한 진리입니다.. 하지만 때로 우린 그 차이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우린 그 몸의 지체라는 사실을 말이죠..

내게 맡겨진 역할과, 다른 이에게 맡겨진 역할은 분명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각자의 역할에 맡는 능력과 가능성을 주셨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역할을 얼마나 충실하게 감당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게 눈의 역할이 주어졌다면, 입의 역할을 할 수 없다고 한탄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어떤 역할을 맡기셨나를 바르게 알고.. 나와 다른 지체들의 차이를 인정하며, 내게 주어진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지체된 나의 바른 모습일 것입니다…

샬롬..

지혜를 구하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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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우리는 지혜가 부족합니다.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지혜는 부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니..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도리어 스스로의 지혜가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순간 하나님께 간구할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시지만.. 그냥 주시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최소한 우리가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간구할 때 주시겠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간구하지 않아도 분명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정말 지혜를 필요로 하고 그걸 얻고싶어하는지, 지혜를 받을 준비가 되었는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어하시는 것 같습니다.

구하기만 하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그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께 지혜를 간구합니다. 부족한 나의 지혜를 하나님의 지혜로 채워달라고..

자랑…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눅 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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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응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원인을 제공한것에 대한 당연한 보상이라는 의미이죠..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도 같은 의미입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건 당연한 자연의 법칙이기도 합니다. 콩을 심었는데 팥이 날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죠…

우리가 예수님을.. 또는 예수님의 말을 부끄러워하면 예수님도 나중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할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우린 살아가는 동안에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그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부끄러워하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예수님을 믿는다는 그 사실을.. 또는 예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건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을 떳떳하게 말하지 못하는 경우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떳떳하게 내세우지 못한다면.. 예수님도 나중에 우리에 대해 떳떳하게 말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걸 부끄럽게 생각하거나.. 떳떳하게 내세우지 못함은 우리의 잘못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예수님을 자랑하며..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레 말할 수 있는 나 자신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 인정받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떳떳하게 자랑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자랑합니다.. 그 분은 나의 주인이시라고..

고집..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단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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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입니다.. 이건 자기만의 고집입니다. 포도주를 마신다고 해서 더러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게 비록 우상에게 바쳐졌던 포도주라 하더라도 말이죠..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 15:11)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에 의거하여 먹는 것을 제한하는 것.. 그런 형식적인 율법에 대해 일침을 가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마시는 포도주 자체가 사람을 더럽히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이건 다니엘의 고집입니다.

하지만.. 이건 아름다운 고집입니다. 이건.. 율법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하나님앞에서 정결하게 하기 위한 자기만의 고집입니다. 행위나 율법이 그렇게 중요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었고,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을 따른다고 스스로를 정당화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하나님앞에서 스스로가 최소한의 고집을 지키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니엘의 그 고집을 아름답게 받아주셨고 결국에는 다니엘을 인정받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혹시나 내가 이러다가 분쟁을 일으키지 않을까..’, ‘따돌림을 당하지는 않을까..’, ‘좋은 분위기를 깨뜨리지나 않을까..’하는 우리의 마음들이 현실과 적당하게 타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자체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스스로의 마음속에 하나님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무언가에 대한 고집은 갖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그저 율법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명하신 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노력일때.. 하나님은 그 속에서 아름다운 결실을 맺어가십니다…

다니엘의 아름다운 고집..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다니엘의 사랑고백이었을겁니다…

자신의 얼굴..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말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약 1: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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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아이러니컬 하게도.. 다른 사람들과 구분되어질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신체가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은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물론 지금은 거울이라는 도구가 있어 스스로의 얼굴을 볼 수 있지만.. 그런 도구 없이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거울이 없던 시절..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알 수 없었을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데 말이죠..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본다고 해도.. 항상 거울만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은 아니기에 스스로의 모습을 항상 기억하고 살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가는 것도 비슷한가 봅니다. 들을때는 깨닫고 그 말이 맞다고 인정하고 받아들이지만.. 그러고 나면 곧 잊어버리니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지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기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도를 듣기만 하는 자는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자기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잊어버린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이라는 의미이겠죠. 그건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잘못된 자기의 형상을 가지고 자신이라고 속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 속에서 잘못된 형상을 만들어내게 되는 사람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원하고 계십니다..

더디 하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약 1: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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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말을 경청할 줄 안다는 거.. 그건 참으로 귀한 능력입니다.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줄 줄 알고.. 그 사람의 마음을 포용해 줄 줄 알면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게 되죠..

자신의 말을 많이하고.. 마음속에 분노가 있으면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듭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무시하게 되고, 그 사람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게 됩니다.
마음속에 분노를 품고 사람을 대하게 되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나쁘게 보이나.. 마음속의 분노를 풀고 사람을 대하면 하나님의 의로 그 사람을 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참 당연한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장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다른 이들의 말을 잘 들어주되.. 내 의견을 주장하고 분을 품는데에는 한 걸음만 속도를 늦추면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고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지는데, 그러지 못하면 우리의 분노가 하나님의 의를 막는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나도 모르게 내 속에서 분노가 올라오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별것도 아닌 일에 말이죠.. 그럴 때마다 다시금 스스로를 돌아보려 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막아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의를 나를 통해 이루시려고 하는데.. 내가 그것을 막는 것은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 꿇어엎드립니다. 나의 부족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의가 가려지는 잘못을 범하지 않게 해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