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함…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 13:10)
Pride only breeds quarrels, but wisdom is found in those who take advice(Proverbs 13:10,N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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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함이란.. 잘난체 하는 것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교만함이란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교만함이란.. 스스로를 높이는 것이 아닌, 스스로의 모습을 바르게 보지 못함입니다. 할 수 있는데도 ‘저는 못해요’라고 말하는 것은 겸손함이 아닙니다. 그건 교만함입니다. 할 수 없는데 ‘내가 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도 교만함입니다.

스스로가 만든 자신의 생각, 자기 자신이 만든 자신의 모습의 틀에 사로잡혀 스스로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교만한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도,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도 못합니다. 성격에 따라 다른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들 역시 마음속으로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스스로가 세운 자신만의 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결국 교만함에는 다툼이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모습은 이런 모습인데 남들은 그게 아니라고 말을 하니 다툼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혜가 있고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권면을 듣고 그것을 자신의 모습에 반영할 줄 압니다. 자기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를 알고 자기만의 틀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자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 그것을 수정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어떤 것이 바른 것인지 결정할 때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결정내리지 않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하며 자기 스스로가 결정합니다. 하지만 겸손한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귀를 기울이고 받아들이고자 노력합니다..

참 오랫동안 이런 교만에 빠져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만들어낸 세상속에서 빠져나오기가 싫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교만함이 내 속에 분명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내 생각에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니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건 교만함이었습니다. 내 생각에 옳다고 생각하면 옳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역시 교만함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받아들이며 함께 느끼던 때가 분명 있었는데.. 어느 순간엔가 나 자신만의 세계속으로 빠져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옳다고 말을 해도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이건 주관이 뚜렷한 것과는 분명 다른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런 교만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 앞에 나의 교만을 모두 내려놓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교만함을 깨뜨려 주시고.. 나를 지혜롭게 하셔서 다른 사람의 권면에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할 수 있도록..

소망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4~26)

For in this hope we were saved. But hope that is seen is no hope at all. Who hopes for what he already has?
But if we hope for what we do not yet have, we wait for it patiently.
In the same way, the Spirit helps us in our weakness. We do not know what we ought to pray for, but the Spirit himself intercedes for us with groans that words cannot express. (Romans 8:24~26, N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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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갖고 싶어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갖고 싶어하는 것은 자기가 갖고 있지 못하는 것에 대한 소망입니다. 이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우린 잊고 삽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갖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한 소망을 품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가집니다.. 그걸 갖기 바라지만.. 혹시나 갖게 되지 못할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기다림은 소망에서 비롯되며.. 소망은 현실을 만들어 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바울은 고백합니다. ‘이와 같이’라.. 성령도 우리를 향해 소망을 품고 참으신다는 말일까요?

이 구절은 우리가 많이 인용하는 구절이지만.. 그저 성령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는 의미로 많이 인용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란 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저 성령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향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소망을 품고 기도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말이죠..

성령님은 우리에게서 찾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소망.. 그것이 언젠가는 현실로 나타날 것을 기대하며 소망을 품고 기다리며 기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겠죠..

우린..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에 소망을 품는다면 그건 내게 현실로 다가올 것입니다.

성령님 역시.. 우리에 대한 소망을 품고 지금도 나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며 기대하고 계시니까요..

소망?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가리켜 말하기를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다 하던 여기 곧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주민도 없고 짐승도 없던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와 및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는 소리와 여호와의 집에 감사제를 드리는 자들의 소리가 다시 들리리니 이는 내가 이 땅의 포로로 돌아와서 처음과 같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 3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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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애써 부인하려고 해도.. 사람은 근본적으로 보이는 것에 소망을 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보이지도, 알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 소망을 품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의 침략으로 무너져버리고 황폐해져 버린 예루살렘을 보면서 모든 소망을 다 잃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곳이 다시 재건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은 그들로서는 품기 힘든 소망이었을 것입니다. 수많은 백성이 포로로 끌려갔고, 예루살렘 성읍은 무너졌으며, 성전역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들에게 보이는 것이라고는 황폐함 뿐이었으며 거기에서는 어떤 회복도 기대할 수 없었을 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땅을 회복시키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니.. 애초부터 회복시키시기 위해 그 땅을 치셨습니다. 그냥 두면 회복되지 못할 부분이 있었기에 기초부터 흔드시고 그 이후에 하나님의 뜻대로 회복시키시는 작업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약속대로 회복시키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소망을 품지 않았지만.. 아니.. 소망을 품을 수 없었지만 그 속에서도 하나님은 회복의 역사를 시작하셨고 이루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소망이 없을때에도, 희망이 보이지 않을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회복을 시키시고 계십니다… 치유하실 하나님을 믿고 모든 것을 맡기렵니다. 내 경험과, 내 생각과, 내 마음으로는 도저히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처럼 여겨진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시기에.. 아니.. 이미 시작하신 일이시기에..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렵니다…

하나님의 마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Your attitude should be the same as that of Christ Jesus(Philippians 2:5, N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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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지도 못하는데.. 아니.. 솔직히 자기 자신의 마음도 잘 모르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내 마음 속에 품을 수 있겠습니까..

‘네 이웃의 마음을 받아들여라..’라는 말씀을 하셔도 할 수 없다고 말할 터인데…

그런데 하나님은 그 마음을 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니.. 품으라는 정도가 아니고.. 예수님의 마음과 똑같아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똑같이 되어야 한다..’

어떻게 그럴 수가..

하지만.. 하나님은 오늘 이 말씀을 제게 주시면서..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그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그 마음을 품어야 한다고.. ‘품도록 노력해라’, ‘한 번 품어봐라’가 아니고.. 그 마음을 품으라고 말이죠..

그 마음은.. 겸손의 마음입니다. 낮아짐입니다. 낮아지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찾아가서 낮아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인간으로 오신 그 겸손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낮아지는 마음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스스로의 존귀함을, 스스로의 가치를 모두 부인하고 포기하고 내어버리는 마음입니다. 자존감을 낮추는 것과는 다른 것이죠. 내 마음속에 있는 많은 욕심들을 모두 내다 버리고 예수님이 낮아지셨듯이 낮아지라고 명령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난 할 수 없다고 하나님께 고백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 할 수 없습니다. 내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의 마음도 품어주지 못하고 이해해 주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일이 가능하느냐고 하나님께 되물어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할때 가능하다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지극히 당연한 진리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빌 2:1)이라고 바울은 말을 시작합니다. 그냥 그러라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권면과 사랑과 위로와 성령의 교제와 긍휼과 자비..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은 ‘united with Christ’라고 표현되는군요.. 예수와 연합된 속에서 그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이 당연한 진리..

그걸 잊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할때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예수님과 연합될 때 예수의 그 마음을 내 마음으로 품을 수 있다는 진리를.. 머리속으로만 알고 있었고 내 삶속에서 이루지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 주인으로 모실때.. 내 속에 겸손이 이루어지고.. 그때 비로소 내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수 있다는 진리를 왜 이제야 마음으로 받아들였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그 겸손한 마음을 내 마음에 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근심..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고후7:10-11)

근심이 생겼습니다. 그 근심이 나를 힘들게 합니다 근심하고싶지 않습니다 참으로 마음이 힘듭니다 하지만 그 근심이 나의 감사의 제목이 되는 것은 그 근심으로인해 하나님앞에 엎드리게 되고 회개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을 다시 점검하게 되었고 하나님 앞에 무릎꿇게 되었습니다 내 잘못들과 내 부족함들을 하나님앞에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마음의 변화가 나라는 인간의 본질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것입니다 완전한 변화는 있을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계기로 내게 변화가 있을것을 기대합니다
그것은 간절함이요 변명하게 함이요 분하게 함이며 두렵게함이고 사모하게 함이요 열심있게 함이며 스스로를 벌하게 함입니다
이 근심은 하나님의 뜻임을 믿기에 내 속에 회개를 이루시고 더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하실것을 기대합니다

회복…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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밧세바를 범한 뒤 나단 선지자의 질책을 받고 다윗이 하나님께 고백한 시편입니다.

상한 심령.. 상처받음.. 치유와 회복.. 어느샌가 저와는 상관없는 단어처럼 아득해진 단어들이었습니다. 내게는 이제 그런 것이 거의 없다고 교만해 있던 저였으니까요..
엄청난 저의 교만임을 깨달았습니다. 내겐 아직 상처가 남아 있었고.. 회복과 치유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리석게도 그걸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오늘.. 주일.. 참 많이 울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아픔의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나를 치유하시고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는 기쁨과 감사의 눈물이었습니다. 내 교만함이 하나님앞에서 철저히 무너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지금까지 느껴왔던 ‘무너짐’은 무너짐이 아니었습니다. 오늘에야 비로소 하나님앞에서 철저히 무너지고야 말았습니다.

내 마음의 상한 심령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고..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만져주시고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단번에 회복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평생이 걸리는 작업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동안 내가 하나님앞에 내어놓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냥 두셨던 상처들을 하나님께서 이제야 치유하고 회복하는 작업을 시작하시도록 내어드렸습니다.

참 아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함이 감사했습니다. 이제서야 그 아픔들을 내어놓은 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지만, 지금이라도 하나님께 그 상처들을 내어놓고 회복시키겠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수 있음이 감사했습니다.. 왜 좀 더 일찍 내어놓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았습니다. 조금만 더 일찍 내어놓았더라면 지금보다는 덜 아플 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상한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치 않으시고 그 속에 치유와 회복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감사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회복의 역사를 시작하셨으니.. 언젠가는 회복될 것을 믿습니다…

정말 많이 울었던 하루였습니다. 지금도 눈이 아프군요.. ^^; 몇년 사이에 이렇게 울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참 많이 감사했던 하루였습니다.. 역시.. 이렇게 많이.. 이렇게 진심으로 감사하며 하나님의 손길과 마음을 느껴보는 것이 얼마만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정말 멋진 분이십니다..

떠밀려 가는 모세..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모세가 가로되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시고 가라사대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뇨 그의 말 잘함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마음에 기뻐할 것이라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 입에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의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출 4: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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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인정받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강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약하고 비겁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이적을 보여주고 그 능력을 주며 가라고 말씀하셨을때.. 그는 끝까지 자기는 가지 못한다고 말을 합니다. ‘주여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셔야지 저같은 사람을 보내면 어쩝니까..’라고 반문합니다..

그는 지도자로서의 카리스마도, 무언가를 해 보겠다는 열정도, 꿈을 향한 열망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40년의 광야생활동안 그의 삶은 그냥 살아가는 그런 모습이었을겁니다. 그런 모세에게 하나님은 엄청난 일을 맡기십니다.

모세는 생각했을겁니다. ‘이건 내 길이 아니다..’라고.. ‘나는 이런 일을 감당할 만한 사람이 못된다..’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모세의 등을 떠미십니다. ‘갈래 안 갈래? 어서 가지 못해!!’라고 모세를 야단치면서 모세의 등을 억지로 떠밀어 보내는 하나님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어쩌면 모세는 투덜거리며 갔을지도 모릅니다.. ‘하필이면 내가 가야 돼? 나보다 더 뛰어나고 더 훌륭한 사람도 많은데..’라고 말이죠..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께 등을 떠밀려 갑니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 등을 떠밀려 다니는 삶인지도 모릅니다. 내가 뭔가를 주도해 나가고, 내가 뭔가를 해 보겠다고 덤벼들었을때라도.. 결국에는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는 고백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한 것 같고.. 내가 이끌어 간 것 같지만.. 돌아보면 그 모든 것이 결국에는 하나님께 떠밀려 간 것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그것이 바로 가는 길일 것입니다. 모세의 이후의 40년의 삶은 말 그대로 힘든 삶이었습니다. 그건 결코 기쁨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있는 동안.. 모세는 하나님께 너무 괴로우니 죽여달라는 말도 하고, 도저히 더 못하겠다는 투정도 부립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께 떠밀려 그 길을 갔습니다..

그 길이.. 기쁨의 길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길이었지만.. 그의 길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길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왜 힘들게 살아야만 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어차피 갖은 어려움이 놓여있는 삶이라면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이 가치있는 삶임에는 분명할 것입니다..

‘이건 내 길이 아니다’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 등을 떠밀려 간 모세.. 비록 힘들고 어려웠던 삶이었지만, 죽고싶을만큼 괴로웠던 삶이었지만.. 그의 삶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이었습니다..

가치있다는 것은..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어차피 삶이 힘든 것이라면(물론 항상 힘들기만 한 건 아니죠.. ^^;)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삶을 살렵니다..

기억지 말라..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시랑과 및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이라 (사 43: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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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란.. 추억의 동물입니다. 수많은 추억들을 지닌채 살아가는 것이 사람입니다. 행복했던 기억들.. 슬펐던 기억들.. 아픔과 기쁨.. 그것이 우리 속에 있음으로 우리를 지탱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오늘 하나님은..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고, 옛적 일들을 생각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추억을 다 버리라는 말씀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그건 불가능하죠..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리지 않는 한.. ^^

이전 일이란.. 옛적 일이란.. 그건 아픔의 기억들입니다. 바벨론으로 끌러간 이스라엘의 아픔 말입니다. 그건 수치였고 아픔이었습니다. 그들에겐 기억하기도 싫은 기억들이었을 겁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픈 기억들에서 우리가 회복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미래가 있기 때문이죠. 하나님이 행하실 새 일들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광야에 길을 내고, 메말라 모든 생명을 죽여버리는 사막에 강을 내는 하나님의 일 말입니다.

아픔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님을 우린 잘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 또한 우리들이죠. 하지만.. 하나님의 새 일을 기대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눈앞에 펼쳐진 광야에 길을 내고, 하나님께서 내 발앞에 펼쳐진 사막에 강을 내실 것을 기대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실 그 일들에 대한 기대가.. 그 기대가 나로 하여금 오늘도 일어서게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계획, 인간의 계획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창 21: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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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계획은 분명합니다. 사람들처럼 불분명한 계획을 세우는 일은 분명 없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계획하시고 확실히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하지만 사람의 계획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으로 계획을 세우고 가능한 한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만, 어떤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계획을 100% 실천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나를 위해 계획을 세우고 계십니다. 그 계획속에서 나의 인생을 이끌고 나가고 계십니다. 하지만.. 나 자신의 불완전함이 하나님의 그 계획에 대한 무지와 신뢰하지 못함을 유발해 내고 맙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가득할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인간의 무지와 불신뢰로 인해 이스마엘을 낳고 맙니다. 그건 분명 하나님의 약속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심으로 그 약속의 성취를 시작하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결정으로 인해 이루어진 또 다른 역사의 시작을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마엘 역시 아브라함의 자손이었기에 그 자손을 창대케 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지켜나가십니다.

분명 인간의 나름대로의 판단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에 조금이라도 걸리는 것이 있다면 그 역시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으로 생각하시고 이루어 주십니다.. 그것이 우리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신실하십니다..
그 분이.. 바로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온유함…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찌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
(딤후 2: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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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함.. 그것이 내 속에 무척이나 부족함을 보았습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으로 다툼을 일으키고, 온유하지 못한 모습으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참지 못함으로 인해 다른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울며 회개했습니다. 겸손하지 못하고 온유하지 못함으로 인해 다른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을.. 하나님의 뜻에 모든 것을 온전히 내 맡기지 못했음을..

하나님의 사람은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는다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하고 있는데.. 나는 아직 많이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한 번 소망합니다. 내 속에 하나님이 주시는 온유함과 겸손함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를 수 있는 마음이 있기를..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