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반대말은…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롬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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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보고 하나님은 정말 무서운 분이시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죠..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랍니다..
미움도..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이 있기 때문에 가지는 마음이니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사람들에겐 무관심으로 대응하십니다.
차라리 매를 든다면 그건 다행이네요..

매를 든다면 그건 그래도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뜻이지만, 그것이 무관심으로 표현되어 진다면 그건 우리에겐 두려움입니다..

이런 자리에 서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칭찬듣는 것이 가장 기쁜일이고 바람직한 일이겠죠. 설사 내가 잘못해서 매를 맞는대도.. 그것도 좋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날 사랑하신다는 뜻이니까요..

하나님께서 내게 무관심해져서.. 내가 무슨 짓을 하든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그건 두렵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품고.. 하나님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나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때로는 매를 맞는 일이 있어도.. 그건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에 행복한 일입니다…

꿈이 많으면..

꿈이 많으면 헛된 것이 많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 (전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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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많으면..
헛된 것이 많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겠지요..
자신의 한계를 벗어난 꿈을 꾸는 것은 결국 이루지 못할 것들이니까요..

말이 많으면..
역시 헛된 것이 많습니다..
말이 많으면.. 실수가 많아지고 헛된 것들을 이야기 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꿈을 꾸지 마라는 말도, 말을 하지 마라는 말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 민감해지기 위해 노력하라는 말입니다..

우린.. 우리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뜻을 나의 뜻에 맞추는 실수를 많이 합니다. 내 꿈을 하나님의 꿈이라고 착각하고 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내가 하는 말이 하나님이 주시는 말이라고 착각하고 말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내 꿈이 하나님의 꿈이 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꿈이 내 꿈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끊임없이 하나님께 민감해지기 위해 노력해야겠죠..

자신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전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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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이 된다는 것..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나를 본받으라’고 말하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더더욱 아닙니다.

바울은 어떻게 이런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교만하다는 이야기도 충분히 들을 수 있을만한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있게 자신이 예수를 본받는자 된 것 같이 자기를 본받으라고 권면합니다..

바울의 이 오만하기까지 한 자신감은 분명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는 그 신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자신감이 되시기 때문이겠죠.

바울은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성격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고도 전해집니다. 육체에 병이 있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다가 회심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담대하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하는 것은.. 더구나 예수님을 본받은 것 처럼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하는 것은.. 두려움마저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울에게 이런 자신감을 심어주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셨던 그 하나님이 지금도 나의 하나님으로 살아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자신감이 되셨던 하나님은..
지금의 나의 자신감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자신감입니다….

십자가..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막 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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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뒤를 따르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할 것과 지고가야 할 것이 있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포기해야 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 욕심과 내 생각와 내 경험들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야 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와 함께 져야 할 십자가가 있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십자가.. 우린 십자가를 ‘고난’ 또는 ‘짐’으로 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다 보면 지고 가야 할 짐이 생기고 그것으로 인해 고난받을 수 있음을 우린 인정하고 그것을 이겨나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갑자기 의문이 들었습니다. 십자가가 과연 ‘고난’인가.. 원래 십자가는 ‘형벌’입니다. 잘못한 죄인들에게 벌을 주기 위한 도구입니다. 그런데 죄없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잘못되었습니다. 정당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하셔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분명 그것은 겪지 않아도 될 고난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도 그런가? 하는 질문에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난 예수님처럼 죄없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난 내 잘못에 대한 책임으로 십자가를 져야 할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건 ‘고난’이 아니라 ‘책임’입니다. 내가 십자가를 질 만한 짓을 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어떤 말씀이었을까요.. 십자가를 질 이유도 없는데 애써 ‘고난’을 받아야만 한다는 말씀이셨을까요.. 아니면 우리가 흔히 인정하듯이 그저 예수님을 따름으로 발생하는 여러가지 어려움을 그저.. 감내해야 한다는 의미일까요.. 그게 아니면.. 내가 져야 할 책임들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내 길은 때로는 어려운 길이다. 즐겁고 행복할 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때도 있을 것이다. 너희는 신중하게 결정해라. 그리고.. 그 결정에 대한 책임은 너희 스스로가 져야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 ‘십자가’가.. 내 잘못에 대한 징계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은 내가 선택한 길에 대한 신성한 책임이며, 내가 가겠다고 결정한 길에 대해 내가 치루어야 할 대가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그런 부분에 대해 말씀하셨고.. 난 그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선택한 그 길에 대한 책임을 지고 갈 것입니다…

20분…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수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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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후..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하나님께서 무리의 가장 선두에 언약궤를 세우면서 지시하신 말씀입니다..

1 규빗이 45cm정도이니까.. 2000 규빗이면 900m정도 됩니다. 이것을 왜 2000 규빗으로 지정하셨는지 하나님의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지만..

900m.. 사람이 걸어가면 약 20분 정도 걸립니다. 저 멀리 보이는 정도의 거리이죠. 그런데 그 간격을 두고 따라가면 행할 길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한 번도 지나보지 못한 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앞에 든든한 인도자가 있다면 그만큼 마음이 놓이겠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시고, 계획하시며, 이루어 가심을 우린 믿습니다. 칼빈의 예정론이 어쩌고 하는 심오한 신학적 해석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것 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근데.. 하나님은 저 법궤처럼.. 우리 발걸음의 20분 앞서 길을 준비하시고 우리에게 갈 길을 보여주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개개인의 인생을 출생부터 사망까지 거대한 시나리오로 쓴 것도, 그 순간순간 기분에 따라 바뀌어지는 변덕스러운 길도 아닌..
하나님의 거대한 계획 속에서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우리의 길을 조금씩 만들어 나가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우린.. 너무 큰 것도, 너무 작은 것도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지구조차도 우리의 눈으론 제대로 볼 수가 없으니까요.. 그런 우리에게 언제 닥칠지 모르는 저 멀리의 것들을 다 보여주면서 ‘이게 네 길이다’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입니다.
우리의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시기에…

내 삶의 20분 앞에서 나를 인도하는 하나님도 보지 못하면서.. 20년 앞의 하나님을 보려고 노력하는 것은.. 어쩌면 어리석은 우리의 욕심인지도 모릅니다.. 20분 앞에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금도 내 곁에서 내게 속삭이고 계시는 하나님께 민감해질 수 있기를…

하나님의 큰 계획을 보고 싶습니다. 내 삶을 어떻게 설계하시고 이끌어 나가실지 기대가 됩니다.. 하지만.. 우선은.. 20년 앞의 하나님이 아닌.. 20분 앞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길을 걸어가 보고 싶습니다…

징조..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암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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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시기 전에 그 일을 보이신다는 말인데..

이 말이 정말인지 모르겠군요.. ‘결코’라는 말을 하신 것으로 봐서는 분명히 그렇게 하신다는 말씀이신 것 같긴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행하시는 것은 분명한데 그 증거들을 정확히 깨닫지 못하는 것은 무엇때문일까요..

이 말씀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은 분명히 그 증거를 보여주셨을텐데 말이죠..

둘 중의 하나일겁니다.. 이 말씀이 거짓말, 또는 예외가 있는 말이든지.. 그게 아니면 하나님의 증거를 깨닫지 못하는 것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증거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겠죠.. 눈이 어두워져서 말이죠.. 또는 하나님께 민감하지 못해서일 것입니다..

물론.. 그 대상이 ‘선지자’로 한정되어 있긴 하지만.. ‘선지자’라는 구분이 특별히 없는 현재로선 어떤 특정한 사람들로 한정짓기는 힘들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군요..

결국..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수많은 증거들을 보지 못하고 지나간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 증거들을 보지 못하는 나 자신의 모습이 조금은 답답하게 느껴지는군요..

하나님의 비밀..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행하심 이전에 보여지는 것이며,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시는데.. 그걸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의 우매함이란…

하나님께 더욱 민감해지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수많은 증거들을 보며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기를..

나 홀로 어찌

그런즉 나 홀로 어찌 능히 너희의 괴로운 것과 너희의 무거운 짐과 너희의 다툼을 담당할 수 있으랴 (신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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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고민을 혼자 짊어진 듯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온갖 것들로 고민하고 걱정하고 신경쓰는 사람들을 일컬어 하는 말이죠..

근데..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도 비슷한 성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의 여러가지 근심과 걱정들을 짊어지는 것도 부족해서 주위 사람들의 고통과 고민들을 다 짋어지고 그것때문에 또다시 많은 고뇌에 빠지는 우리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는 것은 세상 어느 것보다도 값진 일일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고, 그런 아픔의 나눔을 통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한계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러다 보면 스스로 또다시 고뇌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수많은 딜레마와 결정의 순간에서의 갈등에 빠져드는 것이 인간입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아픔을 품고 위로해 주고 싶지만.. 그 모든 것을 안을 수 없다는 자신의 한계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죠..

하나님은.. 우리가 홀로 그 모든 짐을 짊어지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추앙받는 모세 역시 자신의 그런 연약함을 깨달았기에 스스로 모든 짐을 짊어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의 지도자들을 세우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일들을 해 나가고자 했습니다.

‘나 홀로’가 능사가 아님을 하나님은 항상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에겐 수많은 동역자들이 있으며, 그러한 관계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들을 나누어 맡아 함께 이루어 나가는 것.. 그것이 동역과 한몸됨의 비밀임에도 불구하고.. 우린 그런 것을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 동역자를 통해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서로 협력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이돌로 하여 서로 연락되어 한 건물을 지어나가는 것..

그것이 동역의 비밀이며, 진정한 한몸됨의 비밀이겠지요..

무슨 말입니까?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딤전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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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참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많은 가치관을 알고 있고 많은 사상들을 알고 있습니다. 수많은 논리와 철학, 과학적 지식과 많은 생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지식들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의견을 표명하며 많은 가르침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수많은 지식 속에서 많은 생각들을 하며 많은 말을 하지만.. 가끔씩 빠져들 수 밖에 없는 딜레마는.. 도대체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나 자신도 모를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참을 논리를 펴고 말하다 보면 스스로의 논리적 오류에 빠져 허덕일 때가 많죠..

스스로는 그 생각들이 옳다고 생각하며 주장하지만, 어차피 유한한 우리의 지식과 경험으로는 무한한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알 수 없습니다. 때로 이 세상의 가치관과 도덕적 생각으로는 당연하다고 생각되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비쳐질 때도 있으며, 우리의 지식과 상식의 수준에서는 도저히 용납되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일이 하나님을 통해 일어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 모든 것을 통해 깨끗하고 선한 마음을 가지고 바른 믿음으로 사랑을 품는 것이지 우리의 생각 속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눈을 곡해하고 변론하기 위함이 아님을 되새겨 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방법은 참 단순한데..
우린 참 어렵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요…

속된 세상?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하지 말라 (롬 14: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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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속에 죄가 들어와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린 세상을 속되다고 말합니다.
‘세상적’이라는 표현으로 우린 우리 자신과 ‘세상’을 구분합니다.

물론 우리는 구별되어야 하지만..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세상’을 향한 ‘배척’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구별’과 ‘배척’을 혼동하는 저 스스로의 모습에 깜짝깜짝 놀라곤 합니다..

바울은.. 스스로 속된 것은 없고 속되게 생각하는 그 사람에게는 속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의 형제는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귀중한 존재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린 분명 ‘세상’과는 구별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세상’을 배척하는 권리가 주어진 것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세상’에 속해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셨기 때문이죠..

‘세상’을 속되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배척하느냐.. 아니면 ‘세상’속에서 세상과 구별된 상태로 세상을 사랑하느냐..

그것은 나의 선택입니다… 속되게 생각하면 속된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 것이겠죠..

하나님을 기억하라..

가라사대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여늘 나여늘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같이 될 인자를 두려워하느냐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예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 (사 51: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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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참 두려움이 많습니다. 미래의 불확실에 대한 두려움, 수많은 어려움에 대한 두려움…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런 두려움들이죠…

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그러한 것에 두려워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위로자가 되시기 때문이죠.. 내가 두려워하는 대상은 죽을 사람이며 이 땅에서 사라질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를 만드신 분이시기에 어떠한 일이든 행하실 수 있고, 그러한 하나님을 의지하기만 한다면 나에게 있는 두려움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연약한 인간이기에 순간순간 두려움에 휩싸이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때마다 하나님은 나에게 물어보십니다.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하나님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위로로 인해 순간순간 닥치는 수많은 두려움속에서도 나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기억하기를 스스로에게 다짐해봅니다. 연약한 존재일 수 밖에 없기에 두려움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나의 모습이 없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