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me..

이상은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이니라 (레 2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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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의 가장 마지막 절입니다. 하나님께서 레위기를 기록하게 하신 목적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죠..

근데.. 조금 이상한 것을 느꼈습니다. 레위기에 나타나는 대부분의 내용은 제사와 제사장의 규례, 성결과 희생, 속죄의 내용들입니다. 즉 이것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지켜야 할 내용들과 하나님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 책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내용이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명하신 계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라.. 도리어 ‘하나님을 자신을 위하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왜 하필이면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라고 말씀하셨을까요..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서 지켜져야 할 규례들이 하나님을 향한 일방적인 것이 아님을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하는 것이 사람이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드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사람들에게 있어 축복임을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내 것을 누군가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은..그것은 축복입니다. 희생이 아니라 축복이라는 말씀입니다. 더군다나 그 대상이 하나님이라면, 그것이 축복임은 두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섬김으로 행복할 수 있고, 도움을 줌으로 기쁠 수 있고,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즐거울 수 있는 것.. 그것은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섬김을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그건 축복이니까요..

조심스레..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수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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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성경의 어느부분에서든 강조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여호수아는 그 임종의 순간에 하나님을 사랑하되 조심해서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을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것이라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름에 있어 항상 주의하라는 의미이겠죠..

그런데.. 그 말씀이 제게는 문자 그대로 조심스럽게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의미로 들려오는군요.. 사람들이 친근해지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는 허물이 없어집니다. 좋게 표현하면 허물이 없어지는 것이지만 나쁘게 보자면 버릇이 없어지는.. 즉 사람을 가볍게 대하게 되는 경우가 있죠..

가까워진 사이이기 때문에 허물이 없어진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상대를 함부로 대하게 된다면 그건 결코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없죠..

우린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가까워져야 합니다.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부모자식처럼 가까워지고 친밀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함부로 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겠죠..

하나님과 친근해짐과 동시에.. 우린 하나님을 어려워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의 주인임을 잊게 되기도 하죠. 마치 내가 부탁만 하면 모든 것을 들어주는 아라비안 나이트의 마술 항아리 속의 요정인양, 도깨비 방망이인양 생각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 않나요..
우리의 기도는 주로 하나님께 무언가를 달라는 그런 기도이니까 말이죠..

나의 주인이 되시고, 나의 왕이 되시는 하나님. 동시에 가장 친밀한 친구이고 내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담자가 되어주시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을 사랑하되 정말 조심스레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그런 모습이고 싶습니다…

시험.. 욕심의 산물..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약 1: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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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우리는 흔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 때로는 시험하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야고보는 시험을 받는 이유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시험하시는 일은 없다고 말하는군요..

그렇다면.. 우리가 시험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일까요… 그건 아닐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험하다’는 ‘tempt’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건 ‘유혹하다’는 말이죠. 즉 하나님은 우리를 유혹하시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유혹’과 ‘시험’의 차이점은.. 유혹은 그 목적이 그 유혹에 빠지도록 하는데 있지만.. ‘시험’은 얼마나 올바르게 되어 있는지를 검사하는 것이라는 데 있지 않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때로 test하실수는 있지만 tempt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test도 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닐까 모르겠네요.. Test는 그 대상의 수준이 어느정도 되어 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할 때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객관적인 수준이 나타나니까요.
만약 그 대상의 수준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test할 필요가 없죠..

하나님이.. 우리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test하시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 자신보다도 더 나 자신에 대해 잘알고 계시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결국 우리가 ‘시험’이라고 말하는 것들 때문에 힘들어 하는 것은.. 어쩌면 야고보의 말처럼 우리의 욕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하나님의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 내 욕심에 의해 굴절되는 일은 없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욕심이.. 비록 하나님을 향한 욕심이고, 하나님을 위한 욕심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길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수정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거룩함..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레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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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함.. 그것은 우리가 지켜 나가야 할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거룩’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qadosh’는 ‘구별되다(set apart)’ 또는 ‘탈퇴하다(withdrawal)’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즉..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로부터 구별되고, 우리가 거하지 말아야 할 곳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구별됨이란.. 함께 있는 가운데서 그 존재성을 잃지 않고 지켜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존재한다면 거기에는 ‘구별됨’이라는 것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과 ‘또 다른 것’이 함께 공존하는 가운데서 ‘그것’만의 고유한 존재성을 지켜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구별되는 것입니다.

구별됨이란.. 분리됨이 아닙니다. ‘그것’과 ‘또 다른 것’이 따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과 ‘또 다른 것’이 분리되어 존재한다면 그 각각의 존재들 가운데서는 ‘구별됨’이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죠..

우린.. 떄로 ‘구별됨’과 ‘분리됨’을 혼동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세상’는 내가 속할 곳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속에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셨고, 예수님은 우리더러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세상’속으로 보낸다고 말씀하셨죠. 그리고 우리에게 ‘거룩하라’ 즉 ‘구별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세상’과의 분리가 아닌.. ‘세상’속에서 ‘세상’과 공존하며 그 속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지켜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함’입니다..

미완성..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신 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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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인정받는 모세의 마지막날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사실.. 우린 참 많은 꿈을 꾸고, 그것을 이루고 싶어합니다. 가능하면 내가 꾸는 꿈들이 내 눈앞에서 현실로 보여지기를 원합니다.

40년의 궁중생활과 40년의 광야생활… 그리고 40년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기쁨과 고통, 칭찬과 원망을 들어가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나안으로 향했으나.. 정작 그 자신은 약속된 땅으로 들어가지 못한 모세..

그의 마지막 날에 모세는 어쩌면 자신의 삶의 의미를 다시 돌아보았을지도 모릅니다. 뭔가 잔뜩 해 놓은 것 같지만, 나름대로 참 의미 있는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마지막 이루었어야 할, 아니 반드시 이루고 싶었을 그 목표는 이루지 못한 채 떠나가야만 했던 모세..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 이후에 여호수아를 통해 가나안으로의 꿈을 이루시고 그 이후 수많은 역사속의 인물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들을 하나씩 이루어 나가셨습니다…

참 많은 꿈을 꿉니다. 하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 우리나라가 더 아름다운 나라로 변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이 더 멋진 곳이 되었으면.. 하고 바래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받는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그런 바램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별로 변한 것도 없이 여전히 광야위에 있는 스스로를 느끼며 이 생을 마감해야 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한 것은.. 나는 바라볼 수 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그 꿈들을 현실로 이루어 가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겁니다.. 나는 미완성인 채 끝낼 수 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결국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 감사한 것은..

그런 하나님의 멋진 역사 속의 일부분을.. 내게 맡겨 주셨다는 것입니다. 시작도 아니었고, 끝도 아니기에.. 어쩌면 별 의미없어 보이는 내 역할들이 하나님의 역사의 시작과 끝을 이어주는 소중한 연결점이 된다는 것이 감사의 제목입니다..

친구..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 15: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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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친구라는 단어는 참 아름다운 단어입니다.
친구가 있다는 것은.. 참 기쁜 일입니다.

예수님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친구를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참 기쁜 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목숨까지 버리는 사랑.. 그건 정말 큰 사랑일 것입니다.

근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조건이 있기는 하지만요..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 부르셨고..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럼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가장 귀한 친구입니다…

Give me relief..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때에 응답하소서 곤난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시 4:1)

Answer me when I call to you.
O my righteous God.
Give me relief from my distress;
be merciful to me and hear my prayer. (Psalm 4:1, N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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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압살롬에게 쫓길때의 다윗의 기도입니다. ‘곤난중에 나를 너그럽게..’라는 말이 무슨 말일까 궁금해서 영어성경을 찾아보았습니다.

‘Give me relief from my distress’라고 표현하고 있네요.. ‘내 고통으로부터 구원하소서’ 또는 ‘내 고통으로부터 휴식을 주소서’정도로 해석될 수 있겠네요..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면 ‘내 고통에서 한시름 놓게 하소서’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거의 모든 시편에서 볼 수 있듯 다윗은 아들에게 쫒기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한다거나, 그 고통을 주지 말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고통받는 중에서 잠시의 휴식을 달라고 간구하는 다윗의 모습..

다윗은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라는 말을 잘 알고 있었나 봅니다.. 아니.. 그것보다는 인생속에서 고통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다만 순간순간 휴식이 있기만을 바란 것 같습니다.

세상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들에게 쫓기며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8절)라고 말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안전하게 하실 것이라는 전적인 신뢰를 보이고 있는 다윗..

하나님께 대한 이런 전적인 신뢰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건.. 인생속에서의 고통은 당연한 것이기에 그걸 피하는 것이 평안함이 아니라는 진리를 다윗은 깨달은 것 같습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고통이기 때문에 그걸 피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평안함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윗은 안 거겠죠.

그것보다는.. 하나님을 붙들고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평안함의 근본임을 다윗은 알았습니다. ‘고통을 피하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보다는 ‘고통에서 잠깐 쉬게 하시고 그저 내 기도만 들어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드리는 다윗.. 그는 하나님을 찾는 것이 바로 평안함임을 알았기에..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참 평안함은 고통에서 벗어남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단순히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에서 얻을 수 있다는 이 평범한 진리를 잊어버리지 않고 의로우신 하나님께 의뢰할 수 있는 내 모습이 있길 기도합니다…

평안하기를 빌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마 10: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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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전도하라 보내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을 빌라고 말씀하십니다.. 합당하면 평안을 빌고 합당치 않으면 평안을 빌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무조건 평안을 빌라고 말씀하십니다. 합당하면 평안이 임할 것이고 그게 아니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말이죠..

우린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기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 판단과 내 생각에 따라 그들을 좋은 눈으로 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판단에 의해서가 아닌.. 무조건적인 평안을 빌어주는 것입니다. 그 이후의 일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겠다는 말씀이시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사람이 축복을 받을만한 존재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그 축복이 그 사람에게 임할 것인지 아닌지는.. 그 사람에게 달려있는 것이죠..

어떻게 생각하면… 참 무서운 말입니다.. 나 자신이 만약 그 대상이라고 한다면.. 내 이웃이 내게 평안을 빌어주었을 때.. 과연 내가 그 평안을 받을 수 있는 존재인지 아닌지를 스스로 돌아보게 되네요..

내 부족한 판단과 짧은 생각과 편협된 가치관으로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며 그들에게 평안을 빌어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교만함을 우리 속에서 버리고 무조건적인 평안을 빌어주며..

나를 위해 누군가 평안을 빌어줄 때 내가 과연 그 평안을 받을만한 존재인가 스스로를 다시 한 번 돌아볼 수 있는 겸손함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고전 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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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 이 ‘근심’을 영어 성경에서는 ‘sorrow’라는 단어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 ‘sorrow’라는 단어는 우리 말의 ‘근심’보다는 조금 더 강도가 높은 표현이네요.. ‘슬픔’, ‘비통’, ‘비탄’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후회’, ‘고통’의 의미도 가지고 있구요..

우리를 참 힘들게 하는 단어들입니다.. 때로는 이런 단어들 자체가 우리를 힘들게 할 때도 있죠.. 산다는 거..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참 힘든 일이기도 하고.. 때로는 정말 ‘sorrow’한 일이기도 하죠..

바울은 참 이상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을까요… 우린 참 연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근심과 걱정, 슬픔과 비통함이 우리의 사고를 마비시킬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슬프고 비통할 때는 그것을 하나님과 연관시킨다는 것 자체가 힘든 때도 있습니다..

근데.. 바울은 그 근심 조차도.. 아니.. sorrow조차도 하나님과 연관시키며 그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 이 말 전후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신도들에게 ‘근심’을 준 것을 후회했지만.. 결과적으로 그 ‘하나님의 근심’이 고린도 교회의 신도들을 회개함으로 이끌었기 때문에 감사한다는 고백을 합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근심을 주십니다.. 슬픔을 주실 때도 있죠.. 하지만.. 적어도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유익함을 주는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린 역시 연약한 존재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우리에게 유익함을 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 근심때문에 힘들어 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 결과는 유익함이기 때문에 근심해서는 안된다는 그런 말은 못하겠네요.. 힘들어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죠.. 여러가지 근심과 아픔 때문에 힘들어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사람도 아니죠.. ^^;

그러나.. 힘들어 하는 가운데서도, 그 힘든 것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 속에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음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그 아픔과 절망 속에서도 마음 한 구석에 조그마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어둠은 그 자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빛의 부재일 뿐이다’라는 말이 있는 것 처럼.. 정말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어쩌면 근심과 슬픔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 때문에 희망을 잃어버렸다는 그 사실이 아닐까요..

우린..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에겐.. 하나님이 계시니까요…

샬롬…

어제나 오늘이나…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히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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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한결같은 사람이 있다면.. 우린 그 사람을 최고의 가치를 지닌 사람으로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린.. 항상 한결같을 수 없습니다. 주변 상황에 흔들리고, 자신의 마음에 흔들리고, 다른 사람의 말에 흔들리는 것이 바로 우리 사람들이죠..

그러나.. 우리 주님은 언제나 동일하십니다. 하나님의 동일하심은 영원함을 의미하며 그 생각과 결정에 변함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 얼마나 힘이 되는 말씀인지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는 하나님…

그렇기에.. 우리가 얼마든지 믿고 신뢰할 수 있는 그분..

그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한결같으심이 바로 나의 힘입니다.
내 상황이나 내 처지에 상관없이 어제도 나를 사랑하셨고, 오늘도 나를 사랑하고 계시며.. 내일도, 영원토록 날 사랑해 주실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