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여전하시네요…

다시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안위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셨다 하라 (슥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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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신’에 진노하시고 이스라엘을 이방인의 속국이 되게 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본심은 이스라엘을 여전히 사랑하시고 다시 회복시키고자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매를 드는 부모의 마음과도 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우린..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씀을 보면 다시 힘이 나는 것은.. 여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릴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아도 우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항상 그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성경의 곳곳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지식으로는 알고 있고, 마음으로 느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의 약한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겠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시기 위해 정말 열심히 노력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건..

우리를 향한 너무나도 큰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배운 믿음…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사 2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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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무서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두려움에 마음이 떨려오는 것을 멈출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신.. 이스라엘의 멸망의 원인 중 하나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지만..
마음은 이미 하나님을 떠났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외식된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는 성경의 곳곳에 나타나기에 그렇게 새로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다만 가르침 때문이라는 하나님의 판단은 제 마음을 두려움에 감싸이게 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했으며,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혹시나 어려서부터 받아왔던 수많은 가르침과 교훈들에 의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 자신을 기만해 왔던 것은 아니었는지요..

정말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는지 두려운 마음으로 돌아봅니다.. 자신있게 얘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두렵습니다…

정말 내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내 신앙은.. 아니.. 신앙이라고 불리워지는 그 모습은 과연 나의 진실한 모습인가 자문해 보게 됩니다..

겉으로 보이는 나의 모습에, 내가 알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과 생각에 그만 만족하며, 그 속에서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어느새 잊어버리고 살아온 모습은 아니었는지요..

그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살아계십니다..
그 분은.. 나를 죽이셨으며..
그 분은.. 나를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을..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으로 경외하며,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해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의 지혜의 가르침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사람들이 지혜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님을 믿는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깊은 곳에 여전히 살아계시며,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역사하시며 나를 이끌고 나가시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진심으로 믿고 경외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여전히 부족한 저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나누어 주시고..
제 머리속에서 그려진 하나님이 아니라..
실존하시고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마음으로 느끼게 하소서..

비틀거림..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시 37:24)

Though he stumble, he will not fail,
for the Lord upholds him with his hans (Psalm 37:24, N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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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가끔 넘어집니다.. 뭐.. 넘어진다고 표현을 하죠.. 영어성경에는 stumble이라고 표현하고 있군요.. 이 말은 넘어진다는 의미도 있지만.. ‘비틀거림’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어쩌면 ‘비틀거린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네요…

‘넘어진다’ 보다는 ‘비틀거린다’고 표현하는 것이 도리어 맞지 않을까요? 사실 우린 넘어질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우린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이미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승리할 것도, 승리할 것을 약속한 것도 아닌 이미 승리했음을 하나님은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미 승리한 우리가,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넘어질 수는 없습니다. 다만 가끔씩 비틀거릴 뿐이죠..

잘 걷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부모님의 손에 꼭 붙들려 걸어갈 때는 적어도 넘어지지는 않습니다. 가끔 비틀거리기도 하고 넘어지려고 하긴 하지만요..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강한 손으로 우릴 붙들고 있는데 우리가 어찌 넘어질 수 있을까요..

다만 비틀거릴 뿐입니다. 가끔 돌에 걸리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자기 발에 걸려서 비틀거리기도 하죠.. ^^; 그렇기 때문에 우린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넘어진다면 때론 심하게 다치기도 하겠지만, 하나님께서 우릴 강하게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넘어지지 않는 우리는 큰 걱정이 없죠..

우린 넘어지지 않습니다. 아니.. 어느 누구도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잠시 비틀거리는 자신을 보면서 마치 넘어진 것처럼 울부짖을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강한 손으로 우릴 붙들고 계시니까요..

우린.. 넘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비틀거릴 뿐입니다…

증거…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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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의 인생은 계속해서 표적과 증거를 찾는 여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린 끊임없이 뭔가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것이다 싶으면 선택을 하죠..

친구도, 배우자도, 직장도, 삶의 목표도…

어떤 증거, 또는 마음을 결정할 수 있는 계기가 없다면 우린 섣불리 결정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결정일 수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 순간의 그 증거나 계기 역시 그다지 믿을만한 것이 못될 수도 있다는 우리의 생각이 우리를 다시 한 번 망설이게 합니다.

빌립은 예수님께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어떤 증거를 찾고 싶었겠죠.. 지금의 우리들과 같이.. 하지만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이 증거이심을 말씀하십니다..

증거…

우린 증인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이죠.. 증인은 직접 경험한 것을 증거해야 한다고들 하죠.. 글쎄요..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현존하는 사람들 중에는 아무도 없지 않나요? 우리가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하는 것도, 우리가 경험했다고 하는 것도.. 어쩌면 우리가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끼워맞춘 그런 것은 아닌가요? 단지 예수님을 만났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의 일이라고 그냥 인정해 버리고 싶어하는 우리의 욕심이 우리의 믿음의 한 편은 아닌지요…

실제로 예수님을 본 사람도, 실제로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도, 실제로 예수님의 기적을 본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린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이런.. 보지도 않고 증언하면 그건 위증인데요.. 심증만으로는 증언을 할 수 없죠..

글쎄요…

하지만.. 우린 증인들입니다. 왜냐면 우리 마음 속에서 그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기 때문이죠.

우리 마음속에서..
내 삶을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싶어하는 간절함이 있고,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인정하고 싶은 바램이 있습니다.

우린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그 행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의 증거입니다… 그건 억지 아니냐구요?

아뇨..

믿음은..
바라는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만나기를 바라는 예수님을 현실 속에서 구체화 시키는 것이고,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참 수많은 표적들을 요구합니다. 어떤 확실한 것을 보지 못하면 안심하지 못하는 우리의 속성때문이죠.. 당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표적을 보여주십니다..

참 인자한 하나님이시죠.. 사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인 믿음만으로도 우린 증거할 수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참 수많은 증거들을 보여주십니다..

문제는.. 우리의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그 증거들을 증거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 빌립처럼…
항상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던 빌립처럼..

자기가 보지 못했으면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지 않았다고 떼쓰는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수많은 증거와 표시를 찾아내고,
내가 보지 못하는 것조차 믿음으로 현실화시킬 수 있는..
그런 믿음의 모습이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시작..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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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의 ‘태초에’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bereshith’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 ‘Bereshith’라는 말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창세기의 제목이며, 그 의미는 ‘출발점’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심으로 인해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라는군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근원이 되십니다. 우린 가끔 ‘근본으로 돌아가자’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린 우리의 근본이 하나님이심을 가끔 잊어먹는 것 같습니다.. ^^;

뭐.. 어쨌든.. 하나님께서 나의 근본이 되신다는 것을 다시 깨닫는 것은 저로 하여금 새로운 힘을 얻게 하는군요. 전 가끔 그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내 든든한 빽입니다’라구요.. 하지만 이젠 그 말을 바꿔야 할 것 같네요..

‘하나님은 내 근본입니다’.. 라구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내 근본이십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내 삶은 시작이 되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나를 만드셨으며, 그리함으로서 내게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찬 삶을 주셨습니다.

이건.. 정말 큰 힘이 되는 말씀입니다.
아주 돈 많은 사람이 허름한 옷을 입고 다니거나, 라면을 먹고 있다면 아마도 그것을 본 사람들은 저 사람이 풍류를 아는 멋진 사람이라고 말 하거나 무슨 이유가 있어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부자인 그 사람도 그것을 그다지 부끄러워 하거나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이 허름한 옷을 입고 있거나, 라면을 먹는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그 사람을 불쌍하게 여길 것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예로 들어서 좀 그렇긴 하지만.. 어쨌든.. 근본이 다르다는 것과, 자신의 근본을 알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일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을 다르게 합니다. 자신의 근본이 훌륭한 근본임을 깨닫는다면 앞에 닥친 상황에 상관없이 그 마음은 자신감으로 가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근본입니다. 그렇기에 난 존귀한 존재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말이죠…
하나님은 여러분의 근본입니다. 그렇기에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상황이 어떻든 말이죠…

God is my present…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전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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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전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사실.. 우린 여러가지 판단을 함에 있어 우리의 지혜나 경험을 바탕으로 판단하게 됩니다. 물론 그것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임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지혜나 경험보다 더 중요한 판단의 기준이 하나님의 시각임을 우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단의 기준이 우리의 생각과 지혜와 경험이 되어버리는 우리의 모습 또한 우린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는 너무 복잡한 존재인 것 같습니다.. ㅡㅡ+ 마음으로는 이해하고, 인정하고, 그래야 한다고 분명히 생각하지만, 그것이 현실이 되면 우린 또 그 현실에 따라 흔들리게 됩니다.

사실.. 이 말씀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도 부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백이 당연한 것이며, 우리 역시 이런 고백을 해야 한다는 그 당위성에 대해서는 모두가 인정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던 중에.. 말씀 자체에 대한 묵상보다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잘 알면서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나 자신의 모습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으로는 인정하지만.. 현실의 상황에 따라 흔들려 버리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믿음을 선물(present)로 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저에게 그 독생자를 선물(present)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저에게 현재(present)로 다가오셨습니다..

마음으로 인정하지만 현실에 따라 흔들리는 내 모습이 아니라..
마음으로 인정하며 그 속에서 하나님을 따라 살아가는 모습이 되기 위해..

내 과거의 추억도, 미래의 꿈도 아닌 바로 현존하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느끼기고 인정하며, 당신 자신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이 바로 나 자신의 현재이며 현실로 다가오시기를 2003년 첫 주일을 맞이하며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God is my present…

해답..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시 73: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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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의 영원한 궁금증일지도 모르는.. 그 의문에 대한 약간의 답입니다..
이 시편을 노래한 아삽은 그의 시편에서 어떻게 악인이 더 평안하고 재물이 더 많을 수 있는지에 대해 하나님께 의문을 표시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변을 봐도..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으는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은 도리어 일한 만큼의 대가조차도 받지 못하는 불합리한 모습을 많이 보게 됩니다..

도리어.. 정직하고 성실하려고 하면 그건 바보같은 짓이라고, 자기것도 챙기지 못하는 멍청이라고 손가락질 받기도 하는것이 현대 사회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아삽은 하나님께 한참을 기도하던 중에.. 스스로 그 대답을 얻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현재 제대로 서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언제 미끄러질 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렇죠.. 우린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면 됩니다.. 그것이 때로는 힘들더라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방식대로 승리하게 됨을 우리는 압니다.. 그리고 악인들의 결과는 결국 ‘미끄러짐’임을 사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우리의 삶의 모습이 다르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닌가요.. 아삽 역시.. 악인들의 번성함을 보고 실족할 뻔 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도, 악인들의 말로를 몰라서도 아닙니다.

다만.. 알고 있는 것과 그걸 현실로 받아들이는데에 괴리가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아삽은 끊임없이 기도하고 찬양하는 가운데 그 해답을 찾아내고 결국에는 자신의 우매함을 하나님께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것.. 그것이 우리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확실한 답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믿되 몸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의 약함을 솔직히 인정하고, 끊임없는 기도와 노력가운데서 우리의 믿음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한 발짝..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잠 16:9)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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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말씀이고.. 우리의 길을 인도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자주 예로 드는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

우리는 우리의 ‘길(course)’을 마음으로 ‘계획(plan)’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걸음(steps)’을 ‘결정(determine)’하신다..

그저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어쩌면 당연한 사실을 생각하던 저로서는 조금은 다르게 느껴지는 이 대조의 구문을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길’을 계획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길’을 만들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의 ‘걸음’을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는 ‘계획’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결정’하십니다..

뭐.. 사실 말이란 하기 나름이지만.. 이 한마디 한마디에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린 흔히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예비하시고 인도하신다고 말합니다. ‘길’이라는 것은 그 끝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 길만 바로 따라간다면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걸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디로 걸음을 옮기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솔로몬이 왜 우리의 계획은 ‘길’이고 하나님의 인도는 ‘걸음’으로 표현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우리는 끝을 생각하며 우리가 가야할 ‘길’만을 생각하는 반면, 하나님은 우리의 끝을 미리 정해놓으신 것이 아닌.. 우리의 ‘걸음’ 앞에 한 걸음 앞서 가시면서 우리의 걸음 걸음을 하나님의 계획에 맞게 이끄시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큰 계획은 변함이 없겠지만.. 그때 그때 우리의 걸음을 결정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 치 앞도, 단 1분 후의 일도 알 수 없는 우리 인생들이 사실 우리의 ‘길’을 ‘계획’한다는 것은 어쩌면 어불성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도리어 그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가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물론.. 우리의 앞날을 준비하고 계획하며,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분명히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지금 내디디는 우리의 조그만 발자욱 하나하나 역시 소중하고 귀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한 발자국의 깊은 의미를 알고 계십니다..

색안경을 낍시다..

여호와여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 (시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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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기도입니다… 자신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말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자신을 보고 기억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색안경을 끼고 자신을 봐 달라는 다윗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우리는 흔히 본질과 다르게 보는 것을 ‘색안경을 낀다’고 표현하는데.. 대체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죠.. ^^

하지만.. 만약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비라는 색안경을 끼고 우리를 보지 않으신다면.. 우리 중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없게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이라는 색안경을 통해서 우리를 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은 보시지 않고 우리를 의인이라 칭하여 주셨습니다..

글쎄요.. 우리가 서로를 볼 때 이런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이 좋은 일인지 아닌지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을 좋게 보는 것은 좋지만.. 때로는 그 사람의 본질을 바로 보고 그 사람에게 필요한 충언을 해 주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눈에는 사랑과 용서라는 색안경이 씌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의 이유는 필요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당돌하게도 보이는 이 다윗의 기도는.. 분명 우리의 솔직한 기도일 것입니다.. 하나님.. 내 죄는 기억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봐 주십시오..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이 솔직한 다윗의 기도를 본받고 싶습니다… 그리고.. 나의 이웃들을 보는 내 눈 앞에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그리고 용서라는 색안경을 올려놓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방법..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왕상 19: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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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구했던 엘리야의 부르짖음에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앞에 나타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는 강한 바람 속에도, 지진 속에도, 불 속에도 있지 않고 세미한 소리 가운데 있는 것을 성경은 증거합니다…

물론.. 때로는 하나님께서는 바람처럼, 지진처럼, 불처럼 임하시기도 하겠지만.. 죽기를 갈구했던 엘리야의 앞에 나타난 하나님은 세미한 소리와도 같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어쩌면 엘리야는 바람처럼, 지진처럼, 불처럼 하나님께서 임하셔서 자신의 대적들, 아니.. 하나님의 대적들을 완전히 쓸어버리기를 바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세미한 소리로 다가오셨습니다..

우린 때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억울함이나 우리의 어려움을 통쾌하게 해결해 주시기를 바라며 마치 영화속의 영웅과도 같이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기를 바라고 있지 않은가요.. 하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결하십니다. 설사 그것이 우리의 욕심에는 차지 않더라도 말이죠..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이 최선의 방법임을 우린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욕심이나, 우리의 바램대로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실망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