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분…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수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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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후..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하나님께서 무리의 가장 선두에 언약궤를 세우면서 지시하신 말씀입니다..

1 규빗이 45cm정도이니까.. 2000 규빗이면 900m정도 됩니다. 이것을 왜 2000 규빗으로 지정하셨는지 하나님의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지만..

900m.. 사람이 걸어가면 약 20분 정도 걸립니다. 저 멀리 보이는 정도의 거리이죠. 그런데 그 간격을 두고 따라가면 행할 길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한 번도 지나보지 못한 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앞에 든든한 인도자가 있다면 그만큼 마음이 놓이겠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시고, 계획하시며, 이루어 가심을 우린 믿습니다. 칼빈의 예정론이 어쩌고 하는 심오한 신학적 해석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것 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근데.. 하나님은 저 법궤처럼.. 우리 발걸음의 20분 앞서 길을 준비하시고 우리에게 갈 길을 보여주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개개인의 인생을 출생부터 사망까지 거대한 시나리오로 쓴 것도, 그 순간순간 기분에 따라 바뀌어지는 변덕스러운 길도 아닌..
하나님의 거대한 계획 속에서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우리의 길을 조금씩 만들어 나가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우린.. 너무 큰 것도, 너무 작은 것도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지구조차도 우리의 눈으론 제대로 볼 수가 없으니까요.. 그런 우리에게 언제 닥칠지 모르는 저 멀리의 것들을 다 보여주면서 ‘이게 네 길이다’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입니다.
우리의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시기에…

내 삶의 20분 앞에서 나를 인도하는 하나님도 보지 못하면서.. 20년 앞의 하나님을 보려고 노력하는 것은.. 어쩌면 어리석은 우리의 욕심인지도 모릅니다.. 20분 앞에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금도 내 곁에서 내게 속삭이고 계시는 하나님께 민감해질 수 있기를…

하나님의 큰 계획을 보고 싶습니다. 내 삶을 어떻게 설계하시고 이끌어 나가실지 기대가 됩니다.. 하지만.. 우선은.. 20년 앞의 하나님이 아닌.. 20분 앞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길을 걸어가 보고 싶습니다…

징조..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암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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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시기 전에 그 일을 보이신다는 말인데..

이 말이 정말인지 모르겠군요.. ‘결코’라는 말을 하신 것으로 봐서는 분명히 그렇게 하신다는 말씀이신 것 같긴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행하시는 것은 분명한데 그 증거들을 정확히 깨닫지 못하는 것은 무엇때문일까요..

이 말씀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은 분명히 그 증거를 보여주셨을텐데 말이죠..

둘 중의 하나일겁니다.. 이 말씀이 거짓말, 또는 예외가 있는 말이든지.. 그게 아니면 하나님의 증거를 깨닫지 못하는 것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증거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겠죠.. 눈이 어두워져서 말이죠.. 또는 하나님께 민감하지 못해서일 것입니다..

물론.. 그 대상이 ‘선지자’로 한정되어 있긴 하지만.. ‘선지자’라는 구분이 특별히 없는 현재로선 어떤 특정한 사람들로 한정짓기는 힘들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군요..

결국..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수많은 증거들을 보지 못하고 지나간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 증거들을 보지 못하는 나 자신의 모습이 조금은 답답하게 느껴지는군요..

하나님의 비밀..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행하심 이전에 보여지는 것이며,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시는데.. 그걸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의 우매함이란…

하나님께 더욱 민감해지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수많은 증거들을 보며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기를..

나 홀로 어찌

그런즉 나 홀로 어찌 능히 너희의 괴로운 것과 너희의 무거운 짐과 너희의 다툼을 담당할 수 있으랴 (신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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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고민을 혼자 짊어진 듯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온갖 것들로 고민하고 걱정하고 신경쓰는 사람들을 일컬어 하는 말이죠..

근데..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도 비슷한 성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의 여러가지 근심과 걱정들을 짊어지는 것도 부족해서 주위 사람들의 고통과 고민들을 다 짋어지고 그것때문에 또다시 많은 고뇌에 빠지는 우리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는 것은 세상 어느 것보다도 값진 일일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고, 그런 아픔의 나눔을 통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한계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러다 보면 스스로 또다시 고뇌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수많은 딜레마와 결정의 순간에서의 갈등에 빠져드는 것이 인간입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아픔을 품고 위로해 주고 싶지만.. 그 모든 것을 안을 수 없다는 자신의 한계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죠..

하나님은.. 우리가 홀로 그 모든 짐을 짊어지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추앙받는 모세 역시 자신의 그런 연약함을 깨달았기에 스스로 모든 짐을 짊어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의 지도자들을 세우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일들을 해 나가고자 했습니다.

‘나 홀로’가 능사가 아님을 하나님은 항상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에겐 수많은 동역자들이 있으며, 그러한 관계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들을 나누어 맡아 함께 이루어 나가는 것.. 그것이 동역과 한몸됨의 비밀임에도 불구하고.. 우린 그런 것을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 동역자를 통해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서로 협력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이돌로 하여 서로 연락되어 한 건물을 지어나가는 것..

그것이 동역의 비밀이며, 진정한 한몸됨의 비밀이겠지요..

무슨 말입니까?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딤전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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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참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많은 가치관을 알고 있고 많은 사상들을 알고 있습니다. 수많은 논리와 철학, 과학적 지식과 많은 생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지식들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의견을 표명하며 많은 가르침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수많은 지식 속에서 많은 생각들을 하며 많은 말을 하지만.. 가끔씩 빠져들 수 밖에 없는 딜레마는.. 도대체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나 자신도 모를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참을 논리를 펴고 말하다 보면 스스로의 논리적 오류에 빠져 허덕일 때가 많죠..

스스로는 그 생각들이 옳다고 생각하며 주장하지만, 어차피 유한한 우리의 지식과 경험으로는 무한한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알 수 없습니다. 때로 이 세상의 가치관과 도덕적 생각으로는 당연하다고 생각되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비쳐질 때도 있으며, 우리의 지식과 상식의 수준에서는 도저히 용납되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일이 하나님을 통해 일어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 모든 것을 통해 깨끗하고 선한 마음을 가지고 바른 믿음으로 사랑을 품는 것이지 우리의 생각 속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눈을 곡해하고 변론하기 위함이 아님을 되새겨 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방법은 참 단순한데..
우린 참 어렵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요…

속된 세상?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하지 말라 (롬 14: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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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속에 죄가 들어와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린 세상을 속되다고 말합니다.
‘세상적’이라는 표현으로 우린 우리 자신과 ‘세상’을 구분합니다.

물론 우리는 구별되어야 하지만..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세상’을 향한 ‘배척’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구별’과 ‘배척’을 혼동하는 저 스스로의 모습에 깜짝깜짝 놀라곤 합니다..

바울은.. 스스로 속된 것은 없고 속되게 생각하는 그 사람에게는 속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의 형제는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귀중한 존재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린 분명 ‘세상’과는 구별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세상’을 배척하는 권리가 주어진 것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세상’에 속해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셨기 때문이죠..

‘세상’을 속되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배척하느냐.. 아니면 ‘세상’속에서 세상과 구별된 상태로 세상을 사랑하느냐..

그것은 나의 선택입니다… 속되게 생각하면 속된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 것이겠죠..

하나님을 기억하라..

가라사대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여늘 나여늘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같이 될 인자를 두려워하느냐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예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 (사 51: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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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참 두려움이 많습니다. 미래의 불확실에 대한 두려움, 수많은 어려움에 대한 두려움…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런 두려움들이죠…

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그러한 것에 두려워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위로자가 되시기 때문이죠.. 내가 두려워하는 대상은 죽을 사람이며 이 땅에서 사라질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를 만드신 분이시기에 어떠한 일이든 행하실 수 있고, 그러한 하나님을 의지하기만 한다면 나에게 있는 두려움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연약한 인간이기에 순간순간 두려움에 휩싸이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때마다 하나님은 나에게 물어보십니다.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하나님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위로로 인해 순간순간 닥치는 수많은 두려움속에서도 나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기억하기를 스스로에게 다짐해봅니다. 연약한 존재일 수 밖에 없기에 두려움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나의 모습이 없기를 소망합니다…

for me..

이상은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이니라 (레 2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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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의 가장 마지막 절입니다. 하나님께서 레위기를 기록하게 하신 목적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죠..

근데.. 조금 이상한 것을 느꼈습니다. 레위기에 나타나는 대부분의 내용은 제사와 제사장의 규례, 성결과 희생, 속죄의 내용들입니다. 즉 이것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지켜야 할 내용들과 하나님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 책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내용이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명하신 계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라.. 도리어 ‘하나님을 자신을 위하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왜 하필이면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라고 말씀하셨을까요..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서 지켜져야 할 규례들이 하나님을 향한 일방적인 것이 아님을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하는 것이 사람이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드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사람들에게 있어 축복임을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내 것을 누군가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은..그것은 축복입니다. 희생이 아니라 축복이라는 말씀입니다. 더군다나 그 대상이 하나님이라면, 그것이 축복임은 두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섬김으로 행복할 수 있고, 도움을 줌으로 기쁠 수 있고,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즐거울 수 있는 것.. 그것은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섬김을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그건 축복이니까요..

니 바쁘제?

작성자 : 열매

안 바쁨 밥이라도 함 사라..^^

그간 소식도 좀 알려주고..ㅋㅋ

봄이네.. 남쪽바람 훈훈하게 많이 불어오길~

홈페이지 드뎌 다 봤다.. ^^

내가 이쁘다했던 글씨체는 사라졌지만..

그래도 참 이쁘네.. 앞으로도 좋은 내용들이

가득히 담겨 나눠지는 우체통 되길~

조심스레..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수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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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성경의 어느부분에서든 강조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여호수아는 그 임종의 순간에 하나님을 사랑하되 조심해서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을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것이라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름에 있어 항상 주의하라는 의미이겠죠..

그런데.. 그 말씀이 제게는 문자 그대로 조심스럽게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의미로 들려오는군요.. 사람들이 친근해지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는 허물이 없어집니다. 좋게 표현하면 허물이 없어지는 것이지만 나쁘게 보자면 버릇이 없어지는.. 즉 사람을 가볍게 대하게 되는 경우가 있죠..

가까워진 사이이기 때문에 허물이 없어진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상대를 함부로 대하게 된다면 그건 결코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없죠..

우린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가까워져야 합니다.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부모자식처럼 가까워지고 친밀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함부로 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겠죠..

하나님과 친근해짐과 동시에.. 우린 하나님을 어려워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의 주인임을 잊게 되기도 하죠. 마치 내가 부탁만 하면 모든 것을 들어주는 아라비안 나이트의 마술 항아리 속의 요정인양, 도깨비 방망이인양 생각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 않나요..
우리의 기도는 주로 하나님께 무언가를 달라는 그런 기도이니까 말이죠..

나의 주인이 되시고, 나의 왕이 되시는 하나님. 동시에 가장 친밀한 친구이고 내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담자가 되어주시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을 사랑하되 정말 조심스레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그런 모습이고 싶습니다…